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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Nov 02. 2021

"결함을 인정할 수 없다"가 불러온 참극-미드 체르노빌

그 어떠한 비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성역화가 불어온 참극


*어차피 역사기반물이니 스포는 문제가 안 된다 봄.


흥미롭게 본 미드 체르노빌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이 드라마는 원전사고의 끔찍함을 잘 드러냈다고 세간의 호평을 받았지만, 드라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 부분만이 아니다. 사실 본인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자신들의 오류를 끔찍하게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쏘오오련 수뇌부의 종교적 광신성에 있다. 요컨대, 위대한 사회주의 지상락원 쏘오련의 통치에는 그 어떤 오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의 관리책임자였던 디아틀로프는 분명히 결함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 내에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부하들을 독촉해 무리한 설비실험을 강행했고 이 부분은 원전폭발에 명백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디아틀로프를 포함한)원전 수뇌부 3명에게로만 모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무리한 실험을 강행했던 원전 운영진 이상의 죄를 범한 더 큰 원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종교적 신성함과 완전성의 주체인 위대한 소비에트 체제 그 자체였다!


원전에는 비상정지버튼이 있다. 전원버튼이라고 생각해면 될 것이다. 무리한 운전으로 인해 원전에 문제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통제불능이 될 것 같다 싶을 땐 그냥 전원을 내려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저 일순간 전기공급이 중단될 것이며, 저 위의 공산당 간부들한테 쿠사리 좀 듣겠지 뭐.


에이, 시말서 함 가즈아! 운영자들은 전원버튼을 눌렀고, 원전은 그렇게 폭발했다. 



전원 버튼을 눌렀는데 왜 원전이 멈추지않고 폭발했는가? 이것은 드라마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된 테마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지상락원 소비에트의 무결하고 신성한 원전기술엔, 그러나 아주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체르노빌 원전은 처음부터, 아주 재수가 없는 어떤 특정 조건 하에서 전원을 내리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도록 설계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쏘오련 정부는 이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위대하고 무결해야 할 신적 존재인 소비에트 령도체제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할 수 없어서 오류지적 보고서를 그냥 ‘찢어’버렸다. 진실에 대한 폐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란 것은 결코 폐기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특정 이론체계’에 기반 한 것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이론이 가진 논리적 모순은 어떤 식으로건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쏘오련은 너무나 불행했다. 위대한 소비에트가 끝까지 숨기고자 했던 그 모순은, 하필 ‘원전폭발’이라는,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실체를 보이고야 만 것이다. 


위대한 소비에트의 신성한 수뇌들은 끝까지 진실을 감추려고 한다. 이미 분명히 폭발했음을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관리자들이 “원자로는 폭발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폭발할 수 없다!”라는 말만을 종교광신도 앵무새마냥 무한 반복하는 장면은, 구 소련식 공산주의체제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편의 코미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종교에선, 신이 파랑색을 노란색이라 하시면 그냥 그것은 노란색인 것이다. 


정의로운 주인공으로 나오는 레가소프 박사 역시 이런 소비에트식 모순을 품고있는 인물이다. 독실한 공산주의 신봉자인 박사는, 그러나 처음부터 이 이론적 모순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가 고민했었던 것은 폭발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부분이 아니라, 위대한 소비에트의 하나님께서 ‘기밀’로 취급하신 부분을 폭로해도 되는가에 있었다.


KGB는 그런 그를 끝까지 압박한다. 관련 재판에서도 그에게 “쏘오련 정부의 책임을 감추고 모든 잘못을 3명의 운영자에게로 돌리는 증언을 할 것”을 강요한다.(물론 이에 복종했을 때 주어질 엄청난 보상에 대한 언급 역시 빠지지 않는다.)


쏘오련 정부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결국 최후의 순간에 박사의 양심이 공포를 이겨버리고 말았다. 원전폭발에 있어서 위대하신 소비에트가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의 실체를, 진실을 폭로해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격분한 KGB는 레가소프박사를 ‘사회적으로’ 사형시켜버린다. 앞으로 그 어떤 사람도 박사와 교류할 수 없다. 앞으로 레가소프는 그 누구와도 친분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친분관계들은 모두 ‘해제’된다. 기업에서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직원을 법적으로 해고시킬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방식 내지 해병대의 악명 높은 기수열외와 비슷한 것이라 보면 된다.    


결국 이 상황을 견뎌내지 못한 박사는 1988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 



민주진보 스피커들은 애초 극단적 상대주의로써의 포스트모던과 선악 이분법(성역화와 악마화)에 입각한 정치적 올바름이 서로 섞일 수 없음을, 이 부분이 심각한 논리적 결함이라는 지점을 애써 감추고 싶어 한다. 


68혁명 이래로, 반세기동안 문화관념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자신들의 성스러운 지위를 유지하게 위해, 이들은 자신들의 결함을 폐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어디 진실이라는 것이 폐기될 수 있는 것이던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우경화 현상들은 원전폭발 만큼이나 ‘알흠답지 못한’ 현상이다. 그러나 폭발을 거부하고 마냥 기피하려고만 하기 보단 이 ‘폭발’이 담고 있는 어떤 시대적 함의를 이제라도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모순에 대한 시대의 경고를 그저 무시하려고만 한다면, 그 다음에 있을 폭발은 이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레가소프 박사에 의해 ‘결함 있음’을 ‘입증 당한’ 소비에트 하나님은 박사가 죽은 3년 뒤, 박사를 따라 스스로 소멸해버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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