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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Apr 10. 2022

전체주의 동경 심리의 근원이 과연 '남성성'일까?

보호받고 싶은 심리


사회 적응에 실패한, 한 떨기 보추와 같은 가냘픈 소년/청년들이 무척 안 어울릴 것 같은 권위-전체주의 체제에 로망을 느끼게 되는 현상은 여전히 나에게 주요한 관심거리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그랬던 시절이 있긴 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 다 흑역사지만 독일군과 하켄크로이츠를 그리면서 "하일 히틀러!" 이러고 다녔던 적이 있긴 있었다.(어찌 보면 찐따들이 한 번씩 다 거쳐가는 코스인 것 같기도 하다.)


일단 나를 억압하고 사상을 강요하는 '민주진보인권'들이 너무 미웠다. 좋은 말로 가득 차 있지만 여성과 소수인종 불량 청소년만 위하고 주류 인종 남성 모범시민(?)들은 악마화 하는 인간들이 너무 싫어서 그들의 정반대 편 극단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무지성으로 찬양하며 '민주진보인권'들을 엿 맥이고 싶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권위-전체주의 체제가 극단적인 남성성을 대변한다는 일반적인 시각과 상충되는 새로운 관점에 끌리는 중이다. 이를테면, 그 근원을 남성성보단 여성성에서 찾는 거지. 


강한 정부 권력은 언제나 '보호'를 약속하는 프로파간다를 뿌려댄다. "숭고한 유럽 문명을 타락시키려는 저 간악한 유대 자본가 볼셰비키들(당연히 형용모순이다.)들의 간악한 음모로부터 저희가 여러분들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타락한 자본가들의 분열책동을 분쇄하고 숭고한 혁명을 결사 보위하여 노동인민대중을 지켜낼 것이다!"


기존 '민주진보인권'들의 문법 하에선 전혀 보호받는다고 느끼지 못하는 주류 인종의 약한 남성들 입장에선 권위-전체주의 체제의 프로파간다 워딩들이 자신들의 빈 공간을, 해갈되지 않는 보호와 존중의 갈증을 채워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권위-전체주의에 대한 로망 그 근원 심리를 강한 남성성보다 오히려 여성적 측면으로부터 찾으려 했던 유명한 인물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안우파들의 무함마드즘 되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이다. 조던 피터슨은 스스로 충분히 강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남성들일수록 자신들에게 안정적인 결속감과 강한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권위-전체주의 체제에 로망을 느끼게 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그는 우리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강한 남성성'을 복원해야 하는데 소위 '민주진보인권'들이 교육과정에서 소년들의 남성성을 지나치게 악마화하고 있다며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조던 피터슨은 소년들의 건강한 남성성을 키워줌으로써 전체주의의 위협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는데, 필자의 입장에서 그런 총론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 사유의 과정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약한 이들의 입장에선 '자유'라는 단어가 딱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약한이들 입장에선, 상대방이 나의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적절한 통제의 울타리가 차라리 더 호의적으로 여겨지거든. 


'자유'라는 이름이 그저 '방치'로 여겨지는 거지. '약한 나'가 그 어떠한 보호도 없이 허허벌판에 무방비로 내동댕이 쳐져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관'되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일단 나 자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 그렇다 할 만한 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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