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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y 06. 2022

인간 인식의 확장-조사병단

인식의 발전과 진화

진격의 거인에서 파라디 섬의 주민들은 거대한 3중 성벽 속 좁은 세상에서만 살아간다. 에르디아인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프리츠 왕가의 조치였는데 이 조치가 특별히 최악이었던 건 사람들의 물리적 영역뿐 아니라 인식의 영역까지 성벽 안 좁은 공간 속으로 고착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프리츠 왕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조작하여 성벽 밖 드넓은 세상에 대한 기억을 제거시켰고 '그 밖의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행위를 사상적 범죄로 취급하도록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파라디 섬의 주민들은 자그마치 백 년 동안 '그 밖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은 체 살아갔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조사병단. '성 밖 거인들의 세계'를 탐험하며 조사하고 인류 영역의 확장을 추구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하게 합법적인 집단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향한 이들의 시도는 너무나 자주, 너무나 쉽게 좌절되어왔기에 성벽 안의 민중들로부터 '무리한 북벌에 미친 촉나라 대장군 강유'와 같은 취급을 받곤 한다. 성과도 없이 매번 나가서 소중한 세금과 인명만 날라고 온다고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병단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불이 물처럼 흐르는 강과 얼음으로 뒤덮인 사막을 찾아서! 신조 사사게요!


...


누차 반복하는 말이지만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문화관념정신적인 가치를 물리물질적이고 실질적인 가치보다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가장 관심 있게 다루는 고통은 정신문화관념적인 고통인 배제와 미움이다. 배고픔과 같은 물리적 고통보다 혐오/따돌림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에 종종 더 많은 관심이 간다


그런 나의 입장에서 가장 끌리는 이상적인 세상이란, "어느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 세상" 을 너머 "어느 누구도 미움받지 않는 세상"이어야 한다. 최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하자가 있다 해도 그렇게 손쉽게 미움받아선 안된다. 히키코모리, 찐따, 아서 플렉, etc.. 


'배제와 미움'같은 정신문화관념적 고통은 왜 발생하는가? 인간은 서로가 다 다른데 그 사회의 보편적이고 중심적인 인식 수준이 모든 인간들의 입장을 이해할 만큼 폭넓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 사회의 보편적이며 중심적인 입장이라는 인식의 성벽(월 시나, 월 로제, 월 마리아) 밖의 존재들은 그 사회에서 배제와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없애려면,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보편적 인식 수준이 훨씬 더 확장되어야 한다. 구성원 개개인 층위에서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그렇게 그 사회의 보편적 인식 수준이 끝없이 확장되어 가는 것. 그래서 더 다양하고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의 진화이며 역사의 발전이다. 


...


그 사회의 인식 수준이 더욱 확장되기 위해선 정신문화관념적 층위에서 '조사병단'과 같은 활동이 더욱 장려되는 체제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정치적, 문화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필수적이다. 물론 누차 말해왔듯, 정치적 문화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는 소위 '리버럴' 세력은 오늘날 페미 피씨 세력에 의해 잠식당했고(ex : 황실을 장악한 동탁) 이들은 자유라는 간판을 단 거대한 인식의 성벽(ex : 여성은 선, 남성은 악)을 쌓아 나가는 중이다. 인식의 확장을 가로막는 거대한 성벽.


당연히 이런 그들의 행위는 '자유'라는 가치에 대한 배반이며, 바로 그러한 명목으로 처단되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대안우파들은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페미 피씨들이 치고 있는 인식의 장벽에 분노하며, 전근대적 전통-권위-전체주의 질서라는 '더 좁은 인식의 성벽'으로 퇴각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반동이며 역사의 퇴보이다. 다시 말 하지만 선택지가 두 개 밖에 없는 현실에 개탄하며 선택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건 모순이며 페미 피씨의 폭거는 전근대로의 퇴보가 아닌, 더 거대한 자유라는 방식으로 극복되어야만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식적으로 '하나의 옳음' 만을 인정하는 체제에서 인식의 폭은 극도로 좁을 수밖에 없다. '하나의 옳음'만이 인정되는 체제에서 국민들이 '조사병단'과 같은 활동을 하려는 걸 정부가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역자 반동분자 등의 어휘를 뒤집어쓰고서 광장에서 목이 매달리고 화형장에서 불태워진다.


나이 혐오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산업화 세대건 민주화 세대건 통제사회에서 교육받고 성장해 온 이들은 지식량의 산술적인 많고 적음을 떠나 정말로 편협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다양한 대상을 놓고 자유롭게 논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지 못한 이들이기에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도 상당히 한정적인 것이다.


물론 인식을 통제하고 무수히 많은 '범주 밖의 박세환들'을 이단으로 불태워 죽이는 어떤 극도로 억압적인 체제도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측면에선 자유민주주의 사회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룰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정부가 하나의 옳음만을 강요하며 무수히 많은 국민들을 '인식맹'으로 만들고, 그렇게 '인식 밖의 박세환들'을 무시하고 짓밟으며 일구어낸 그런 어떤 성취들에 대해선 도무지 그 위대함을 인정해 줄 수가 없다.


그 성과가 인간의 정신적 활동 영역을 축소시키고 '무고한 박세환들'에게 배제받고 미움받는 고통을 뒤집어 씌우고서야 가능한 성과였다면, 무고한 이들이 흘린 눈물 위에서만 가능한 성취였다면 그런 성과는 찬사를 받아선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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