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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y 08. 2022

정치적 자유주의, 문화적 자유주의

있어야 할 건 있어야


얼마 전 모임에서 지인과 대화하다 나온 이야기.


"자유주의 그런 거 어차피 다 소용없어요. 어차피 자유도 서로 뺏고 빼앗는 것에 불과한데요 뭘. 잘난 놈들은 자유세계 건 통제사회건 어딜 가도 잘 살 것이고 못난 놈들은 어딜 가도 빌빌 거릴 뿐이죠."


이 말을 듣는 순간 한동안 멍~해 졌던 것 같은데, 사실 그 이야기는 수년 전 내가 했던 이야기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문화적 자유와 같은 '비 물질적 가치'만 중시하면서 정적 경제적 약자들의 '실질적인 빈곤'에 대해선 도외시하는 현상을 비꼬면서 '반 자유주의자 박세환'이 종종 했던 말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친구'에게 저 이야기를 처음으로 해 주었던 것도 나였을 터.


...


물리물질적이고 실질적인 삶을 중시함에 정치적, 문화적 자유주의는 거의 취급하지 않던 나에게 소위 리버럴(민주 진보 인권)들은 매번 이렇게 시비를 걸 곤 했었다. 니 말마따나 경제적 여건만 중요하고 정치적 문화적 자유 따위 아무짝에 의미 없는 허구일 뿐이라면, 북중러식 통제사회나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 사회가 서구식 자유사회보다 못할 게 뭐가 있냐고.


당시 난 답변을 회피했었다. 아니, 답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내가 여기서 자유주의를 까면서 같잖은 위악을 좀 부려본 들, 설마 북중러+이슬람 원리주의를 실질적인 대안으로 여길 날이 진짜 찾아오겠어?ㅋ 어차피 그렇게까지 생각할 인간이 어디 있겠냐고. 그런 사람은 페미니즘이 싫다고 IS로 찾아들어간 김군 하나 정도로 족했다.



... 그런데 실제로 '그날'이 찾아왔다. 서구식 자유주의가 혼돈에 빠져들고, 북중러나 전근대적 종교 원리주의 사회를 대안으로 탐색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정말로 진지하게 말이다! 서구식 자유에 환멸을 느끼면서 북중러식 통제사회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과거 나의 안일하고 같잖은 위악질들이 이 흐름에 소정의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비통한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오늘날의 세상은 내 예상보다 더 많이 선을 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난 잘못됐던 걸 바로 잡아야 할 것 같다. 정치적, 문화적 자유주의는 결코 '허구'가 아니다!  


세상엔 오직 경제적 여건만이 중요할 뿐 정치적 문화적 자유주의 같은 가치들이 정말로 허구에 불과하다면, 같은 수준의 경제적 여건이 보장된다는 가정 하에서 북유럽의 선진국 사회와 사우디 같은 걸프만 산유국 극단적 원리주의 사회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게 되어버리고 만다.


특히나 나와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일 수록 더더욱 그런 위악을 자제해야 할 것인데


만일 누군가가 "학교, 군대, 직장 다 별거 아니잖아. 그냥 일진, 선생, 상급자, 상사들 비위 좀 맞춰주고 하면 다~ 알아서 잘 굴러갈 일이고 다~들 그렇게 잘 해내고 있는데 넌 대체 얼마나 모자란 인간이기에 남들 다~ 해내는 단체생활 적응 하나도 못해서 빌빌거리고 있냐?"라 말한다면, 아마 많은 '박세환들'은 지독한 불쾌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교실에서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 못 걸고 화장실 3사로에서 혼자 밥 먹었던 인간들이라면, 군대에서 고문관 짓 하던 그런 인생들이라면 "권위주의 통제사회에서 삶의 어려움이랄 게 뭐 별거 있냐?ㅋ" "민주화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ㅋ"따위의 말을 함부로 꺼내선 안 되는 것이다.


"남자답지 못하다."이런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바로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가고 통치자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이 문들 두드리는 그런 사회는 SF영화 속에나 나오는 허구가 아니라 오늘도 지구 어딘가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현실이다. 


안락한 방구석에서 커뮤니티를 들낙이며 아무 말 대잔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끔은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가 개뿔 X도 아니라 느껴질 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해병대 캠프도 힘겨울 우리들이 실제로 가게 된다면 한 달도 버거울 갑갑한 전체주의 통제국가를 추종한다는 건, 우리가 지금 누리는 '그 개뿔도 아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강냉이 털리고 손가락 따여가며 투쟁했던 '선대 박세환들'의 피로 물든 노고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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