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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y 23. 2022

사회주의와 파시즘

희망찬 내일을 제시할 수 있는가?


삼국지 만화 창천항로에는 유비와 관우가 만나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의형제 이전에, 관우는 유비에게 왜 천하를 노리는 그 험난한 싸움의 길을 가려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유비가 답한다.


"천하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천하 사람들의 웃는 모습. 이것이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유비군 여정의 '총론'이 된다. 그리고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정치사상이라 하더라도,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건설적인 총론 하나 즘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없으면 그건 정치사상 아니다.



...


종종 극렬 사회주의자와 파시스트(대안우파)는 동일해 보인다. 둘 다 서방 자유주의를 혐오하며 통제와 억압의 필요성을 강조하곤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둘은 분명히 다르며, 또한 달라야 한다.


사회주의자가 반미 반서방을 주장하고 또한 통제를 주장하건 어쨌건, 이들에겐 '총론'이 존재한다. 


이들에게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그 처절한 혁명의 길 끝에 무엇이 남냐고, 무엇 때문에 인류가 그러한 길을 걸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들은 그에 대한 답을 내어 놓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철학과 그러한 철학 하에 세계 인민을 평안케 할 어떤 정책들을 내어 놓는다. 이들이 주장하는 '피와 죽음의 길'은 그러한 '총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자 각론이 된다.


종종 미제와 서방에 대한 억하심정에 전체 인류를 위한 총론을 망각해버리고 그저 미제와 서방을 응징하기 위한 피와 죽음의 길 만을 원툴로 강조하게 되는 이들도 나오긴 하는데(주로 NL계열) 나는 이들을 더 이상 사회주의 내지 좌파로 분류하지 않는다. 이는 미제와 서방에 맞섰다는 이유로 나치나 일제를 좌파 사회주의로 분류하지 않음과 같은 이유이다.


파시즘(대안우파)에선 그러한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어떤 총론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에겐 인류가 끝없이 편을 갈라 죽고 죽이는 피와 죽음의 길 그 자체가 각론이자 총론이고 목적이 된다.


대안우파 현상을 논하며 수년째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이 짝 계열 사람들은 대체로 밑바닥에서 치이고 짓밟히며 살아온 이들이 많다. 때문에 이들은 '밝고 명랑한 사랑과 평화'이런 개념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혐오하고 증오한다. 배부른 귀족들의 거짓된 헛소리라는 거지. 이들의 세계관에선, 인간은 그저 끝없이 서로를 죽고 죽여야 하는 저주받은 짐승에 불구하며 그것이 조물주의 뜻이자 자연의 섭리인 게 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전부터 나는 파시즘이나 대안우파를 사상이라기 보단 '현상'이라고 보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어렵고 그럴싸 한 전문용어로 떡칠이 되어있다 한들, "최종적 승리 이후 남겨진 인류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어놓을 수 없는 사조라면, 아무리 잘 봐주어 봐야 그저 '잘 쓴 지정학적 분석글'일 뿐이기 때문이다.(이를테면, 필자가 예전에 썼던 '동아시아 해양 나토론'같은 건 지정학적 분석이지 정치적 사상이라고 말 하긴 애매하다..)


다시 말 하지만, "최종적 승리 이후 남겨진 인류는 어떤 통치를 받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사조라면 그건 정치적 사상이라 부를 수 없다.


+하다못해 진시황도 천하를 통일한 이후엔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이라는 건설적인 통치 유산을 내어놓았다.


마키아밸리나 한비자의 그런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어두운 생각들 조차 "그런 냉혹한 과정을 통해서라도 천하가 통일되고 안정되어야 남은 천하만민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건설적(?)인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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