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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Aug 23. 2022

성현들의 시각

죄악과 병든 마음

애써 '전통'을 기반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인류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다는 위대한 선생들의 뜻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사바세계의 중생이 그 뜻을 완전히 알 순 없겠으나, 최소한 노오력이라도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삶은 고(苦)다. 아픔이다.


그리고 아픔은 누가 겪는가? 병자가 겪는다. 무엇이 병들었나? 마음이 병들었다. 거짓된 나(자아)로 인한 집착이 마음을 병들게 하고 고통을 만들고 이윽고 몸까지 상하게 한다. 우리 모두는 그 병자이다. 사바세계의 중생이며 길 잃은 어린양이다. 


그럼 죄(罪)란 무엇인가? 이는 온몸에 고통을 느끼는 병자가 밤새도록 비명을 지르느라 병원의 모두가 밤을 설치게 함이다. 모두가 잠에 드는 밤에는 다들 조용해야만 한다. 그것이 룰이다. 하지만 온몸이 타 들어가는 끔찍한 고통 속에 있는 병자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며 방황한다. 그래서 모두가 고통을 받는다. 애써 따지자면 죄(罪)이다. 하지만 이를 미워할 수도 없다. 고통 때문에, 병든 마음 때문에 나오는, 말 그대로 '비명소리' 이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서 누가 가장 고통받은 이인가? 밤새도록 비명을 지른 환자가 가장 고통받은 이이다.


만일 자신이 잠을 설쳤다고, 밤새도록 시끄럽게 군 이를 피와 죽음으로 응징하고 정화해야 한다 말하는 대안우파 전통주의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누구보다고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리새인이며, 사실 고전적 교리를 들먹이지 않고 일상적 기준으로 보아도 사이코패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민주진보 리버럴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마약과 섹스에 찌든 방탕한 삶을 미화하고 낭만화해왔던 건(지겹게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는 오늘날까지도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모범생을 적대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일진 인싸들이 미화되는 청소년물 흔한 클리셰의 기원.) 그러한 삶' 속에 어떤 저항과 반항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를 향한 저항과 반항인가? 근엄한 전통 엄숙 보수주의를 향한 반항이다. 민주진보 리버럴들은 그 근엄한 엄숙 보수주의자들 때문에 2차 세계대전 그 엄청난 홍역을 치렀다고 굳게 믿었다. 때문에 그들은 '마약과 섹스에 찌든 방탕한 삶'을 새로운 황금송아지로 삼고 이를 숭배하는 의식을 치르면서, 2차 대전을 유발했던 백인, 남성, 서구 문명을 향한 끝없는 증오와 적대를 표출하며 '그 끔찍한 징벌'의 재발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애써 나쁘게 말하자면 '죄(罪)'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숭고하신 그분'들이 이를 증오와 응징의 눈으로 바라볼 리는 없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바라보겠지. 2차 세계대전 그 난리가 얼마나 엄청났으면, 그로부터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PTSD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민주진보 리버럴은 2차 세계대전이 만들어 낸, 지구촌 규모의 거대한 PTSD였던 것이다.


(한국 민주진보 리버럴의 경우는 수십 년 된 군부독재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피해의식)


대안우파는 '전통'을 팔아가며 그들을 피와 죽음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병든 건 느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민주진보 리버럴들이 밤새 내 지르는 비명소리가 반복됨으로 인해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고 결국 미쳐버린 것이다.


이들은 방탕한 섹스를 즐기는 삶을 '악마화'하고 응징하려 한다.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락한 형이 있다. 이 형은 온 가지 더러운 짓으로 돈을 벌며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하지 말라는 수 없이 방탕하고 타락한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이를 보다 못한 동생이 칼을 들고 나서 형이고 나발이고 가족의 명예를 위해 저 새끼 죽여버리고 나도 끝장날 거라고 설친다. 이를 바라보는 부모 마음이 어떨까? 심지어 칼을 들고 설치는 동생이 "이게 다 엄마 아빠를 위한 거야!"라고까지 말하고 있다면?


민주진보 리버럴과 전통주의 대안우파는 거대한 상처의 다른 표출 양상이며 같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이 모든 게 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치료되는 것인가? 죽음조차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른다면, 그게 치료되는 것이라 한다. 열반, 해탈


"아 이제 조만간 죽겠구나^^ 그냥 죽으면 되지 뭐 까짓꺼ㅋㅋ^^"


하지만 우리는 아직 덜 치료되었기 때문에 죽음과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한다.


"안돼! 아직 죽을 수 없어! 살려줘! 끄아아아악!!!"   


(불교는 그 '열반'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선 '위대하신 그분'과의 접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



필자가 '전통'을 팔며 세를 넓히는 정치세력들을 그켬하는 건, 거기엔 피와 죽음의 희열과 쾌감을 위해 알지도 못하는 성현의 말씀들을 팔아먹는, '불꽃으로 사회정화'를 외치는 바리새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항상 반복하는 말이지만 위대한 성현의 말씀과 경전들은 실물 정치에 반영되는 순간부터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설령 원전이 왜곡되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으로 변질된, 실물 정치에서 말하는 소위 '전통주의'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독창적 의미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물 정치'에서의 전통주의는 그들이 상징으로 삼는다는 위대한 성현들의 원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현대 자유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낙오된 박세환들의 증오와 원한을 자양분 삼아 그들에게 열패감을 안겨다 준 이들을 화형장에 매다는 희열과 쾌감의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설령 거기에 어떤 '세속적 의의'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필자는 도무지 그들을 긍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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