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선 밖의 세상으로
스토리텔링(문학, 영화, 만화, 게임, etc..) 들을 보면 선과 악이 규정되어 있는 유형이 있고, 선악의 구분 없이 양 측의 입장을 고루 살피는 유형이 있다.
사실 지난 수천 년간 잘 나아갔던 유형은 전자이다. 선과 악이 이분법으로 칼같이 나뉘어있고, 악으로 분류된 쪽에 대한 이해는 필요치 않다. 그들은 특유의 악행으로 사람들의 공분을 유발하다 결국 각성한 주인공 일행에 의해 갈려나가며 그렇게 사람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역할을 부여받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난 수천 년간 인류가 유지해 온 통치방식이기도 했다. 공동체는 선과 악을, 정상과 비정상을, 좋음과 나쁨을 선포하며, 악으로 분류된 이들에 대한 이해는 필요치 않다. 이를 통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그 어떠한 정신문화관념적 배려도 받을 수 없는 차디찬 배제의 밑바닥으로 밀어 넣어 왔다 하더라도, 이 방식이 사회통합과 치안안정에는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작용해 왔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여기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주로 서구의 68혁명을 거치며 '위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뿜어져 나왔는데, 소위 '포스트모던' 내지 '탈 근대'로 불리는 이들은 "설령 그 방식이 일시적으로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낸다 하더라도 더 이상 '저런'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동안 배제된 자들의 아픔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외쳤고 그렇게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소수 문화, 이교문화등의 주가(?)가 크게 오르게 된다.
그리고 문화시장에선 그동안 유지되어 오던 선악 이분법을 넘어 소위 '마왕의 입장'도 돌아보는, 선악 이분법이 뭉개지는 새로운 유형의 이야기들이 선보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또 다른 반발들이 터져 나왔다. 그간 '탈근대주의'니 '해체주의'니 하면서 사회적 옳고 그름을 너무 심하게 뭉개다 보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졌다고, 다시 적절한 통제와 억압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노라고 말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소위 '대안우파'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게, 문화시장에서도 다시금 선과 악을 칼같이 나누는 스토리텔링들이 각광을 받는 추세이다.
...
설령 세상에 선과 악을 칼같이 나눌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물리물질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으로써의 '통치'는 어느 정도의 규정선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다. 때문에 필자는 다소 억압적으로 느껴질 만 한 어떤 가혹한 방식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통치에 있어 부분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문화관념적 영역에서 만큼은 그 어떠한 규정선도 없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수천 년간 인류의 진보는 '그 규정선 밖'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명심하라. '규정선 안'에서 이루어진 진보는 거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물리물질적이고 실질적인 통치적 필요로 인해 처벌받을 이가 있다 하더라도, 정신문화관념적 측면으로 미움받아야 할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게 예수의 관점이며 부처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현들의 관점처럼, 세상 그 어떤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닿아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끝없는 인식의 확장이며, 인류의 진보이며, 모든 이들이 예수 부처가 되는 궁극의 이상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측면에서
세상 모든 선과 악을 철폐하고 모든 성역들을 해체하겠다고 주장했으면서도 여성을, 소수 문화를, 반항과 일탈 문화를, 일탈적 성(性) 문화들을, 소수인종과 소수 문화를 새롭게 성역화시키고 이러한 '새로운 황금송아지들'로 텅 비어버린 만신전을 다시금 꽉꽉 채워 넣어버린 민주진보 리버럴 페미 피씨들의 실책은 앞으로 계속 까여나가도 할 말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