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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Sep 11. 2022

영국 왕실과 올리버 크롬웰

공화정 일장춘몽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로 새로 등극하는 왕은 찰스 3세. 영국 역사에서 세 번째 찰스 왕이 된다.


앞선 두 찰스 왕의 시대는 영국 역사를 통틀어보아도 참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이때가 영국의 17C로 왕권과 신권의 충돌이 극대화되었던 시절이었으니까. 


찰스 1세는 자신에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의회의 '신하들'을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어서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처단하려 들었다. 왕의 군세는 의회군을 압도했고 의회의 '신하들'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바로 그때 두각을 드러낸 한 남자가 있었으니, 영국사를 통틀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낸 걸로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서는 '기인'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영국사에서, 올리버 크롬웰만큼 호불호의 특성들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인물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일단 그의 '호'측면을 이야기해 보자면, 그는 극도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열세에 몰렸던 의회군을 추스려 왕의 군세를 꺾는 데 성공했으며 결국 왕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신하들을 처단하겠다고 들고 일어섰던 찰스 1세는 본인 자신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찰스 1세를 처단한 크롬웰은 이러저러한 정치적 과정(ex: 추가 쿠데타)을 거쳐 결국 왕정을 폐지하고 영국에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호국경'이라는 명칭을 달고 공화정의 수장으로 등극했다. 여기서 크롬웰의 두 번째 장점이 나오는데, 그는 군인으로서도 충분히 유능했지만 통치자로서의 능력 역시 발군이었다.


우리는 영국 하면 다들 '대영제국'을 떠 올리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 해양제국'의 이름에 걸맞은 나라는 절정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던 네덜란드였다. 영국은 구석 섬나라 깡촌이었고. 그런데 크롬웰은 '깡촌 섬나라'를 이끌고 네덜란드의 위세에 들이받았으며, 결국 무역과 군사적 측면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이로써 한창 주가를 올리던 '대 네덜란드 제국'은 그 상승세를 멈추고 지난한 국력의 하락기를 겪게 되며, 반대로 영국은 대 해양제국으로 나아가던 네덜란드의 길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그' 대영제국을 향해 힘 찬 발돋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영제국의 초석을 올리버 크롬웰이 다 닦아 놓은 거라고ㅇㅇ


이렇게 '호'만 때어놓고 보자면 사실상 영국 역사 최상의 성군인데 그럼 대체 뭐가 '불호'였을까? 


올리버 크롬웰


...


간단하게, 크롬웰은 독재자였는데, 그것도 '너무' 독재자였다.  


크롬웰은 극단적인 청교도 광신도였고, (청교도식) PC충이었다. 그런 크롬웰이 다스리는 영국은 언제나 '청교도적으로' 경건하고 신성해야만 했다는 게 문제였지. 비 타협적이고 타인의 입장을 잘 살피지 못하는 건 유능한 군인 출신 리더들의 유구한 특성이기도 한데, 여하튼 '독재자' 크롬웰은 이런 경건함을 국민들에게 폭압적으로 강제했다. 마음대로 노래도 못 불러, 말도 못 해, 맘대로 술도 못 마셔, 춤도 못 쳐..


대외적으로 초강대국 네덜란드를 꺾어서 국가는 가면 갈수록 강성대국이 되는데 실제 개별 국민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감은 가면 갈수록 똥망이 되었던 거지ㅇㅇ


크롬웰이 도입한 이런 영국식 금욕주의는 영국 요리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맛있고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마음까지 더럽고 타락한 마음으로 매도되어 오랫동안 전해 오던 맛있는 레시피들이 점차 사장되어갔고 결과적으로 국왕부터 빈민까지 다 같이 맛대가리 없고 푸석푸석한 물질 덩어리들을 그저 살기 위해 억지로 주둥이에 쑤셔박는, 역설적으로 평등한(?) 나라가 되어버렸던 거.


(그래서 오늘날 영국인들은 중화요리 내지 인도요리를 더 선호하며 자국요리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모든 호불호를 종합해 보았을 때 영국인들의 전체적인 평가는? 음..


... 위대한 호국경 크롬웰 각하께서 드디어 서거하셨을 때, 이런 '크롬웰식 공화정'을 계속 지속하고파 했던 영국인은 없었다. 영국인들에게 '크롬웰 맛'은 너무 썼고, 또 너무 매웠다. 결국 영국인들은 크롬웰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가 있던 찰스 2세를 다시 왕으로 불러 세움으로써 스스로 왕정으로 회귀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찰스 2세


당당히 왕으로 복귀한 찰스 2세는 크롬웰을 비롯해 공화정을 주도했던 인사들의 무덤을 모조리 후벼 파서 '감히 국왕폐하께 맞서려 했던 불경하기 짝이 없는 대역죄인'이라는 죄목으로 부관참시를 해 버렸다. 썩어가는 송장들이 저잣거리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을씨년스러운 풍광 아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영국의 공화제 실험은 허망하게 종결되었고 그 뒤로는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실험을 반복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오늘날까지도 왕국으로 남아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국의 유구한 왕권/신권 대립 경쟁이 다 끝났던 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옥신각신하던 두 힘은 결국 다소 엉뚱한 계기로 극적 타협에 이르게 되는데..


어느 나라건 역사를 보면 왕이 정당한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신하들은 왕실 족보도를 펼쳐놓고 다음 후계자를 물색하게 되는데, 1714년 영국인들이 그렇게 찾아낸 정당한 왕위 계승자는 영국 땅에 그 어떤 일면식도 없는 독일인 '조지 1세'였건 것이다.


영국 국내 사정은 커녕 영어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이 '뉴비왕'이 영국의 통치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 독일산 갑툭튀 왕은 영국의 통치에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잘 나갔던, 자신의 본진인 하노버 선제후령의 통치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영국의 중대소사를 신하들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최종 결제만 해 주는 식으로 신하들과 타협을 보게 된다. 그게 '총리'로 대표되는 영국식 내각제의 기원이었고 이 틀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내려오게 되었던 거ㅇㅇ


수백 년 동안 온 가지 난리통으로 전 브리튼 섬을 피로 물들여왔던 왕권과 신권의 처절한 대립은 이렇게 다소 허탈한 종결을 맞이했던 것이다.  


조지 1세


+영국의 유구한 왕권/신권 경쟁은 '먼저 맞은 매'에 가까웠는데, 이렇게 영국에서 왕권/신권 대립이 종결된 시점부터 대륙의 다른 유럽 국가들에선 왕권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 극대화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니 민주주의니 어쩌고 저쩌고. 물론 '매를 먼저 맞은' 영국은 그런 혼란들로부터 한 발 비껴나간 상태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대영제국의 확장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기여하게 된다.


++영국인들은 '크롬웰'이라는 이름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2차 대전 중 자신들의 주력전차에는 '크롬웰'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자신들의 전차가 적들에게 뭣같은 존재로 여겨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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