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그리고 주체와 객체
페미니즘이 미는 여러 피해 서사 중 그냥 지나치기 힘든 하나는, 역사 속에서 여성이 언제나 객체화되어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역사책은 언제나 남성들의 서사로 가득하다. 위대한 전사, 장군, 통치자, 일개 병사에서부터 왕, 황제까지, 전부 남자 아니던가? 이러할진대 어찌 "지금까지의 역사는 온통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페미들의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할 텐가?
(언제나 그러했지만) 많은 안티 페미들이 이 지점에서 말린다. 이들은 어쭙잖게 "역사책 속엔 여자도 더러 나온다."는 식으로 덤벼보려 하나 당연히 언급 비율에서부터 압도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피해 서사에 상대가 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을 상대하려 한다면 좀 다른 접근을 해야만 한다.
"그래! 지금까지의 역사에선 언제나 남성이 주체였지. 중요한 건, 그래서 '주체인' 남성이 '객체인' 여성보다 더 행복했냐는 거야!"
…
시대가 원시에 가까울수록, 남자(수컷)들은 정말 많이 싸운다.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싸우고, 짝짓기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싸우고, 부족 간에 싸우고, 문명이 커지면 이것들이 전쟁으로 발전한다. 매번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 보니 살아남는 이들이 별로 없다. 정말 강한 수컷 개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살아남은 '강한' 수컷 개체는 보통 무리의 암컷들을 일방적으로 겁탈하며 자신의 우월한 유전자를 남길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암컷들은 '씨받이'라는 명분으로 어지간하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원시적인 사회일수록 일반적으로 암컷의 생존율이 수컷보다 더 높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일반적으로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의 그것보다 더 높다. 남성의 삶에 위험요인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이는 마치 기자와 같아서, 당연히 더 자극적이고 '튀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당연히 집안에서 얌전히, 그리고 안전하게 바느질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아낙의 이야기보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는 전장의 전사들 이야기가 더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여성이 객체로 밀려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오늘날까지도 군사력은 한 집단의 생존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때문에 전쟁을 담당하는 남자들이 집단 전체의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주요 통치자는 모두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페미들은 이러한 과정이 무척이나 고까운 것 같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힘센 남성이 집안에 남아 논매고 밭매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여성이 군대에 징발되어 여성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치자. 집단 무력의 중추인 군대가 온통 여성으로 가득 차 있으니 군사지도자도 전부 여자였을 것이고, 이들이 왕, 황제까지 다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여자를 중심으로 기록되는 것이지. 물론 실제로 살아남는 여자의 수는 언제나 남자의 수보다 훨씬 적었을 테지만.
이것은 '여자들'에게 더 유리한 삶인가? 드디어 '주체화'되었으니 행복한 삶인가?
주체와 객체를 따지며 여성의 피해 서사를 주장하는 페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이들은 주체화된 삶이 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 남자들은 그저 남자라는 이유로 '주체화'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수한 시험 속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주체화'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주체화'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되지 못한 무수히 많은 남자들은 객체화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씨를 남겨보지도 못한 체 삶으로부터 강제 퇴장당해야만 했다.
이번에도 결론은 간단하다. 세상에 '그저 남자라서' 일방적으로 더 행복한 부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