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라인 쳐진 자유도 자유인가?
*<정치이념 용어의 모호함> 글에서 언급했던 바대로, 정치이념 용어들의 의미는 많은 경우 무척이나 모호합니다. 이 글에서 언급하려 하는 신좌파 역시 그렇죠. 때문에 저는 이 글에서 말하는 신좌파에 대해 '68 혁명을 거치며 종래의 좌파진영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 양태'정도로 별도의 규정을 해보고자 합니다.
20C이후 각종 정치세력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다 보면 몇 가지 일관된 패턴이 드러나곤 한다. 어떤 세력이건, 자신들이 '저항자'의 위계에 있을 때는 격렬하게 자유를 주장한다. 상대주의, 자유주의의 원칙 하에 세상은 '다른 목소리를 가진 우리들'의 견해도 존중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자들'이 결국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치 그들의 과거 압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신성화, (어제까지만 해도 주류였던) 적대자들의 견해를 악마화 해버린다. 패배한 헤게모니를 지지하는 행위는 이제 철저하게 배척된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느라 여념 없던, 패배한 헤게모니 일당들이 이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새로운 '저항자'로써의 투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68 혁명으로 떠오른 신좌파 일당 역시 이 흐름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아 보인다.
…
신좌파들은 극단적 상대주의로써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며 사실상 무한정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면 안 돼"라는 '가이드라인'이 있어선 안된다고 여겼다. 요컨대 가이드라인 속에서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제법 넓다 하더라도) 울타리 속에서의 삶이 진짜 자유일 순 없는 법이다.
가이드라인이 없는 '진짜 자유'를 위해선, 공공의 적으로 찍혀버린 공권력과 공공질서는 물론이고, 정말 '최소한'이라고 여겨졌던 인륜적 금기들 조차도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간 유지돼 오던 모든 인륜적 관습들이 압제의 상징으로 모독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데서나 섹스와 마약을 즐기는 행위가 마치 꽤나 깨어있는 지성인의 덕목인 마냥 여겨지곤 했다.(더 나아가 문화계에선 불량 청소년 내지 범죄자 집단과 같은 반 사회적 존재들을 낭만적으로 미화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신념(?)엔 태생적인 모순이 담겨 있었다.
신좌파들이 주장했던 그 '무한한 자유'역시 '가이드라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좌파들이 주장했던 무한한 자유와 이에 의한 투쟁에도, 특정 상황 하에 특정 방향성으로만 적용되어야 했다. 암묵적인, 보이지 않는 '룰'이 존재했던 것이다.
'무한한 자유'라는 명분으로 여성이 남성을 찌르는 것은 용인되었지만 그 반대는 용인되지 않았다.
'무한한 자유'라는 명분으로 흑인이 백인을 찌르는 것은 용인되었지만 그 반대는 용인되지 않았다.
'무한한 자유'라는 명분으로 청소년이 성인을 찌르는 것은 용인되었지만 그 반대는 용인되지 않았다.
'무한한 자유'라는 명분으로 이슬람이 기독교를 찌르는 것은 용인되었지만 그 반대는 용인되지 않았다.
이 '룰'을 어긴 이들은 극우 봉건 파쇼 추종자로 매도된다. 때문에 누구든 이 룰을 어기려 할 때에는 사회적 매장까지도 기꺼이 각오해야만 했다.
…
사실 68 혁명 이후 한 동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사회가 기울어져 있음에 상대적으로 더 불리한 처지에 있는 몇몇 정체성들의 존재에 대해 많은 대중들이 동의했었기 때문이다. 여성, 흑인, 청소년, 이슬람이 가진 피해 서사는 "충분히 잘 먹히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동안은 애써 강압적인 분위기가 없다 하더라도 대체로 사람들은 저 '가이드라인'을 존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과거의 많은 관습들이 철폐되고 사회가 보다 진보하면서 발생하였다. 전근대적 관습과 억압들이 철폐되어 갈수록, 점점 많은 이들이 "가이드라인으로 특별 보호를 제공받는 몇몇 정체성들의 피해 서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이드라인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나 저런 고정된 피해 서사들을 기반으로 사회문화의 주류적 위치에 서게 된, 이젠 더 이상 저항자가 아니게 된 '그때 그 시절의 저항자들'은 가이드라인 밖의 자유를 요구하는 대중적 움직임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기존의 가이드라인 체계를 훨씬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서구사회 기준으로) 90년대부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활용되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을 아예 대놓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 한때 그들이 그토록 추구했던, '가이드라인 밖의 자유'라는 대의에 대한 완벽한 배신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비난해왔던, 전근대적 압제자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바로 그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은 다수의 대중들을 더욱 분노케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이 기만과 모순의 균열 속에서 대안 우파가 싹을 틔었다.
…
어찌 보면 처음부터 내재되어있던 모순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도 똑같은 무리였던 것이다.
이제 오늘날 신좌파라는 단어는 더 이상 약자들의 대변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때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전편에서 말했듯이, 언어의 의미라는 것은 시공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 신좌파라는 단어를 또 다른 압제자, 변절자, 그리고 기만과 위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그동안 자신들이 범해온 위선과 기만들을 대중들에게 용서받는 것뿐이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한 죽음을 또다시 자신들의 사회문화적 기득권 유지를 위한 고정된 피해 서사로 포장해 팔아먹으려는 어느 역겨운 행태들로 보건대, 아마 '신좌파 반성'이라는 미래는 앞으로도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