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파. 그 고독하고도 험난한 길
스타크래프트를 해 본 이라면 누구나 프로토스의 세계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는 칼라이로 불리는 기본 프로토스. 다른 하나는 다크템플러로 상징되는 네라짐. 네라짐의 가장 큰 특징은 신경삭을 잘라냄으로써 칼라를 통한 상호 연결을 거부하고 개별 개체의 독립성을 선택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칼라를 통한 전체주의적 통합을 거부하고 개별 개체의 독립성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들은 주류 칼라이들로부터 반역자로 내몰렸고, 결국 잔혹한 소탕작전 끝에 고향인 아이어에서 쫓겨나 은하계 벽촌 of 벽촌, 샤쿠라스라는 행성으로 이주해 살아야만 했다.
간신히 샤쿠라스를 개발 해 그나마 살 만 해졌을 즈음 저그 침공으로 인해 고향 행성 아이어를 날려먹은 칼라이들이 난민이 되어 대거 샤쿠라스로 도망처 오게 되었으니 이 상황을 바라보는 네라짐들은 무슨 기분이 들었을까?
상식적으로 바로 "안 꺼져?"를 외치면서 신나는 죽창 파티를 벌임으로써 칼라이 토스들에게 "여기서 죽으나 아이어에서 뒤지나 그게 그거"의 양자택일을 강요했어야 마땅했을진대, 놀랍게도 네라짐들은 초월적인 포용력을 발위해 칼라이 난민들을 대거 수용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칼라이 난민들의 이주가 종결된 뒤에는 난민인 칼라이들에게 네라짐과 동급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 통합정부를 구성했을뿐더러(델람의회) 그 통합정부의 수장을 칼라이 출신이 가져가는 것까지 용인해 주었다.(아르타니스)
이 모든 것은 프로토스 통합의 정치적 이념과 고향 탈환의 신성한 대의 하에 이루어진 네라짐들의 대승적 양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 주었다 해서 칼라이들이 네라짐들에게 달리 고마워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모든 네라짐들이 이 상황을 수용했던 것도 아니다. 양쪽 간의 정치적 충돌은 불가피했고 실제 양측의 사상자까지 발생했던 돌발 사태에서, 칼라이 수장 아르타니스는 자기 칼라이 지지자들의 눈치를 사리느라 네라짐 사망자 쪽의 장례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 속에서 네라짐들의 분노와 반발은 납득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이를테면 네라짐들 중 대 칼라이 강경파였던 울레자즈는 너무 빡이치다 못해 완전 흑화 돼서 칼날여왕, 아몬과 더불어 스타크래프트 세계관의 3대 대악마가 되어버리고야 만다.
("제라툴이여, 그들(칼라이)이 우리에게 했었던 짓들은 실로 용서의 범주를 넘어가는 것이오." - 칼라이 고위기사를 살해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던 울레자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양보와 협력이 이루어졌던 것은 순전 3명의 네라짐 고위 지도자들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라짐 부족장 라자갈, 암흑 정무관 제라툴, 모한다르. 그런데 라자갈이 칼날여왕에게 희롱당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제라툴이 듀란의 혼종을 보고 멘탈이 나가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 프리메이슨 음모론이나 찾아다니는 종말충이 돼버리고 난 후, 반항하는 네라짐들을 설득하며 프로토스의 통합을 유지하는 이 어려운 역할(+아직 경험이 일천한 라자갈의 딸, 차기 족장 보라 준 키우기)은 오직 늙고 병든 모한다르의 몫으로 남게 된다.
이것은 정말 고단한 길이었다. 칼라이들은 걸핏하면 "죽은 여족장 라자갈의 유지"를 팔아먹으며 모한다르와 네라짐을 이용해 먹으려고만 했고, 이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다는 이유로 네라짐 동족들은 모한다르를 병X으로 취급했다. 죽은 어머니와 네라짐 큰 어른의 깊은 통찰을 이해하기 어려운 어린 보라준은 강경파와 어울리며 이런 모한다르에게 사사건건 반항적 태도를 일삼는다.
마음을 의지할 만한 아무런 친구도 없는 이 칡흙 같은 고독 속에서, 결국 그는 아르타니스를 도와 어찌어찌 황금 함대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고 아이어 탈환작전이 이루어지려는 찰나, 젊은 강경파 네라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야 만다.
젊은 강경파 네라짐 반란군들은 일부러 칼라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짓밟고 학살하도록 유도하고, 이 과정을 동족(네라짐)들에게 노출시킴으로써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델람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모한다르는 이들의 정치적 계산을 읽었고, 그것이 가져올 정치적 파국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막아야만 했다.
간신히 반란군의 역장 벽을 뚫고 들어가 반란군과 싸우게 되었으나, 숫적으로 열세 + 심신은 늙고 쇠약했는데 같은 네라짐 동족을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상대를 기절시키는 약한 공격만을 고집하다 보니 얼마 못가 제압되고 반란자의 시퍼런 칼날은 늙은 몸의 폐부를 관통하고야 만다. 같이 들어온 보라준이 황급히 모한다르를 감쌌으나 이미 치명상을 입고 난 뒤였다.
"라자갈.. 대모님... 그리웠습니다... 돌아오셨군요...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
모한다르는 결국 이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고야 만다. 그리고 반란군은 칼라이가 아닌, 보라준에 의해 제압되며 프로토스 사회는 그렇게 간신히 재 봉합된다. 그리고 젊은 반항아였던 보라준은 완전한 네라짐의 지도자가 되어 그녀가 그간 그토록 반대해왔던 어머니와 모한다르의 유지를 이어가게 된다.
…
나에게 모한다르의 쓸쓸한 삶이 유독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온건파'라는 모질고 고독한 길을 잘 보여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일부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남용되어서 그렇지 정말 신념을 가지고 가는 온건파의 길은 종종 (응보 감정에 손쉽게 모든 것을 내 맞기는) 강경파의 길보다 훨씬 고단하며 또한 고독으로 가득 차 있음을(강경을 외치는 동료들에게 변절자, 타협 주의자, 기회주의자로 매도되기 때문에) 이 캐릭터의 삶이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엔 타로 아둔
엔 타로 모한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