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틸 수가 없다
베트남전이나 아프간-소련 전쟁처럼, 약자가 압도적인 강자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몇 가지 존재한다.
1. 약소 세력이 강대국에 맞서 투쟁한다면,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영토는 초토화되고 거주민들의 삶은 완전히 걸레조각처럼 짓이겨져 나갈 수밖에 없다. 약소 세력이 거주민들의 높은 충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 이들은 삶을 보존하기 위해 강대 세력에 손쉽게 투항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경우 약소 세력의 장기적인 저항은 불가능하다. 고로 1차적으로 확보해야만 하는 조건이 거주민들의 절대적인 충성이다. (전술적으로 조금 더 따져보자면, 거주민들의 지지가 없이는 필수적인 게릴라 활동을 전개할 수가 없다.)
거주민들은 가족이 해체되고, 학살당하며, 온 집안이 불타오르는 상황에서조차 약소 세력을 지지하며 강대 세력에 굴복하지 않아야만 한다.
거주민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얻으려면, 약소 세력과 거주민간 명백하게 공유되는 지점이 있어야만 하는데(반대로 말하자면 거주민과 침략 강대 세력 간에 명백하게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보통 민족 내지 종교가 이 부분에 들어간다.(이념은 솔직히 좀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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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가 워낙에 강하기 때문에 단순히 거주민들의 높은 충성만으론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전쟁은 파괴활동이지 생산활동이 아니며, 고로 전쟁이 길어질수록 밑천이 부족한 약소 세력 쪽의 힘이 먼저 빠질 수밖에 없다.(영토가 직접 파괴당하는 쪽이 약소 세력 쪽이다.) 때문에 약소 세력은 침공한 강대 세력에 대해 명백한 적대 의지를 가진 뚜렷한 동맹세력을 외부에 확보해 두고 있어야만 한다.
그 외부 동맹세력은 침공 세력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강대 세력이어야 하며, 이 세력은 기나긴 저항 전쟁 동안 소모되는 엄청난 양의 재화와 서비스를 모두 충당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에겐 소련이, 아프간-소련 전쟁 당시 아프간엔 미국이 이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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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부의 지원세력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외부의 지원물자를 반입할 수 있는 안전한 보급 루트가 확보되어 있어야만 한다. 약소 세력은 자신들을 지원해주는 외부세력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이 좋으며, 아니면 최소 우호적인 세력들로 둘러싸여 있어야만 한다. 적의 포격으로부터 안전한 항구를 확보하고 있다면 상황은 한결 나아진다.
이런 이유로,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은 사우디 UAE연합군의 맹공 속에서 호데이다 항을 목숨 걸고 사수했다.
이즘 보면 쿠르드족이 지닌 지정학적 비극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현지 쿠르드 세력들은 1번 조건(거주민들의 충성 확보)만을 만족시킬 수 있다.
쿠르드인들은 4개국(터키, 이란, 시리아, 이라크)으로 나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매인 이 4개국은 "쿠르드 세력 확대를 막아야 한다."는 명제에 있어서만큼은 명확하게 동의를 하고 있다. 때문에 쿠르드족을 돕고자 하는 외부세력은 유사시 서로 다른 이 4개국을 한꺼번에 적대할 각오가 되어있어야만 하며, 현실적으로 그러한 정치적 동인을 가진 국가는 지구 상에 이스라엘 정도가 유일하다. 그리고 당연히 이스라엘은 4개국을 한거번에 상대할 '능력'이 없다.
설령 외부 특정 국가가 쿠르드인들을 돕고자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안전한 보급 루트를 확보할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법은 4개국 중 한 곳에 선전포고를 하고, 먼저 뭉개버림으로써 안전한 육로를 확보해두는 것뿐이다. 당연히 쿠르드애들 숨통 좀 트여 주겠답시고 단순한 지원을 너머 직접 참전까지 각오할 국가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쿠르드인들이 가진 모든 지정학적 불행의 원천은 그들이 4개국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며, 쿠르드족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쿠르드 세력들은 외부의 번듯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이 그들이 아직까지 독립을 쟁취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