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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r 19. 2023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복귀?

어버이로부터 독립된 삶이 진정한 성인의 조건

아직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어린아이에겐 힘 세고 따뜻한 아버지의 품이 필요하다.

깊은 우울감에 빠진 정서장애 환자에겐 향정신제 약물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모든 건 임시방편이지 영구방편일 수 없다.


나이를 먹어서도 어버이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는 온전한 성인이라 말할 수 없으며, 일상적으로 약물에 의존하는 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약물의존증, 약물중독증이 된다. 어쩠던 둥 인간은 결국 종국엔 외적 존재를 향한 의존 없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전통 복고주의자들의 말마따나, 정신문화관념적 자유주의는 결코 무지갯빛 가득한 꿈동산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그동안 정신문화관념계에 존재해 왔던 '모든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의 품'을 해체시켜 놓았다. 중세적 신, 왕조질서, etc.. 자유주의의 정신계는 의존하고 숭배할 만한 대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허허벌판이며, 이 속에서 모든 옳고 그름을 혼자서 스스로 찾아 나아가야만 하는 삶을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데, 이는 많은 이들에게 해방의 기쁨보단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의 극단적인 고독으로 다가오게 된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 고독을 견디지 못해 마약 내지 섹스에 절어서 지내게 되며, 또 어떤 이들은 그 자유주의의 고독을 피해 과거의 기억 속 어린 시절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히틀러나 스탈린, 푸틴, 나치독일이나 쏘오련, 북중러이란식 권위주의 질서체제, NL 내지 JMS과 같은 극단적이며 폐쇄적인 사이비 공동체, etc.. 


하지만 전술했듯, 나이를 먹어서도 어버이의 품 속에 머무는 삶이나 끝없이 향정신성 약물에 의존하는 삶이 올바른 삶일 수 없듯이, '정신적 자유주의의 황량한 고통'을 끝까지 거부하려는 삶이 올바른 삶일 수는 없다. 그건 노예의 삶일 뿐이다. 운터멘쉬.





예수는 30살에 황량한 광야를 홀로 거닐며 온갖 유혹을 해쳐내고서 스스로 존귀한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거대한 가르침을 펼쳤다. 석가모니는 모든 수행자그룹으로부터 외면받은 상태로 끝없는 고독과 싸우며 홀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이 성인이 되는 위대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정신문화관념적 자유주의는 더욱 강화되어야지 또다시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해방이라는 이름의 자유주의 훈련장에서 그 끝없는 고독으로 한없이 고통받으며 수행하고 성찰하여야만 한다. 그러한 자유주의 고통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성인(adult, saint, Übermensch위버멘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현대 자유주의의 모순과 결함을 북중러이란식 '가부장적 아버지의 복귀'로 극복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결사 반대해 온 이유이다.





지금은 대안우파계에서도 한 물 간 사람이지만, 조던 피터슨의 통찰이 정말 인상적이었던 지점이 있었다.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강력한 전체주의 사회를 동경하는 남자들은 강한 남자들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약한 남자들이라고. 약하기 때문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서는 걸 두려워하는 거라고 말했었지.


정말이지 꽃이 지고 나니 봄이었던 사람 아니었나 싶다. 


+유대인을 죽이고서 미소 짓는 나치 친위대 병사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거대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애교와 아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 아빠, 나 오늘도 유대인을 죽였어요. 어서 잘했다고 칭찬해 주세요^^ 어서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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