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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r 25. 2023

이근과 구제역

이근의 남성성

구제역이 이근에게 '현피'를 신청한 일로 온라인 공간 여기저기가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모냥이다. 


혹자는 그러더라. 이근은 원딜러라서 근접전이 약해 피지걸 근접캐인 구제역을 이리저리 피하고 싶을 거라고.

이 부분에 대한 내 생각.




이근이 실제로 구제역한테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건 어쨌건, 불변의 사실이 있는데 이근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실제로 죽을 상황'까지 찾아가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던졌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근을 싫어하던 많은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장의 이근'이 영화적 장치를 동원한 허구이자 사기극이라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작금은 여러 정황들에 의해 이근이 실제로 전선에 있었음이 사실로 확정되었다. 


당시 이근은 스스로 엄선한 '마동석들'을 부대원으로 선발해 함께 갔었지만 그 '마동석들'은 전선의 참혹함을 목도하자마자 36계 줄행랑을 쳐 버렸고 결국 얼떨결에 혼자 남은 이근만이 실제로 임무를 수행하다 부상을 입어 귀국하게 되었다. 


'부상'을 입었다. 이 말을 조금만 달리하면 적의 총탄이나 포탄이 아주 약간만 각도를 달리했어도 이근은 그 자리에서 한 줌 가루로 빻아져 불귀의 객이 되었을 거라는 의미도 된다. 어찌 되었건 이근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동전 던지기의 확률 위에 자신의 목숨을 올려놓았던 사람인 것이다.


이근이 구제역에게 먼지 날리도록 두들겨 맞는다 하더라도 그게 이근의 삶을 거쳐갔던 최악의 전장은 아닐 것이다. 이근이 우크라이나에서 스스로 마주했던 그 경기장에는 중재를 봐주는 심판도 없었고 반칙이라는 개념마저 존재하지 않았었으니까. 패배는 자존심 타격이나 굴욕, '사회적' 생명 상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물리적인 육신의 파멸로 직결되는 그런 곳이었다.





보면 이근의 '남성성'에 시샘을 표하던 남정네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방구석에서 보추캐릭터나 빠는 필자는 '남성성'이라는 가치와 별로 친하지 않아서 그 심정들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만 그 '시샘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있다. 

만일 당신이 이근의 남성성에 질투를 느끼고, 그 남성성을 찍어 누르고 싶다면, 당신도 신념을 위해 목숨을 동전 던지기에 내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심판도, 반칙도 존재하지 않고 당신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적군이 우글거리는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적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오라. 그러면 온 사회가 당신의 '남성성'을 칭송할 것이다. 


피지컬 근접탱커가 진정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대중 앞에서 입증하고 싶다면, 애초부터 원딜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제한된 링 위에서 심판의 중재를 받으며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그 출중한 피지컬과 근접전 능력으로 백병전에서 적의 목을 따 가지고 오면 되는 것이다.   


+모친을 모욕했다던데 그럼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를 걸어야지 왜 현피? 그리고 그것도 구제역이 먼저 시비를 틀었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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