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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Jul 20. 2023

교사

희생양의 머리에 '압제자'라는 이름의 가시면류관을 씌웠다.

누차 반복하는 말이지만, 민주진보 리버럴 신좌파들은 많은 정체성들을 악의 축으로 설정해 놓고 그들을 향한 투쟁을 부추겨왔다. 페미니즘이라는 미명 하에 '남성'이라는 정체성을 무찔러야 하는 악의 축으로 공격해 왔다는 건 너무 자주 언급해 온 부분이지만, 민주진보 리버럴 신좌파들의 '투쟁'이 오직 '남성'을 향해서만 이루어졌던 건 아니었다.


교육현장을 다룸에 있어 민주진보 리버럴 신좌파들이 줄곳 악마화해 온 대상 중 하나가 바로 '교사'였다. 더러운 앙시앙레짐(기성 체제) 재생산 역할을 맡아온 악의 첨병이라는 미명 하에 교사는 '제복을 입은 자들(경찰+군인)'과 더불어 심심찮게 악마화되었는데, 이를테면 민주진보 리버럴 신좌파들이 주도권을 잡은 문화시장에서, 특히 청소년 학원물에서 '교사'들이 줄곳 어떻게 묘사되어 왔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반면 일진 양아치는 너무나 자주 미화되어 왔다.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며 위선적인 교사를 향해 거침없는 반항을 날리는 힙하고 민주진보적인 날라리 영웅들.


교육현장에서 학생을 괴롭히는 가장 거대한 악이 교사에서 같은 또래 학우인 일진 양아치들로 전환된 지 오래였음에도, 고리타분한 리버럴 신좌파 X세대 투쟁논리 하에서 학생인권을 논하고 확보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교사를 표적으로 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교사들은 손과 발이 묶였고 입이 막혔지만, 책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고삐가 풀린 일진들은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지만 문제가 터지면 모든 건 언제나 교사책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교사가 수업중에 학생한테 처 맞고 교사가 교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대가 도래했다.





모든 문제가 그너무 민주진보 리버럴 신좌파 사회관념 때문에 도래했고, '그것'만 부수면 아~~ 무 문제없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마냥 이야기하는 것 역시 지나친 과장이긴 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인 건 맞다. 적어도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 '문제'라고 인식한다면, 이제 학생인권이 아니라 교사인권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면, 과잉된 교육열과 빈부격차 내지 열악한 교육예산뿐 아니라 그동안 청소년 문화 학원물들에서 교사집단에 대한 악마화가 너무나 쉽게 이루어져 왔음에 대해서도 '한 번 즘은' 고민해 보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제 지친다. 전 세계의 '민주진보세대(서구와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그 압도적인 인구력으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이상 민주진보 리버럴 신좌파적 가치체제에 대한 비판은 절~~~~ 대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는 걸 우리는 이미 페미 피씨 문제를 통해 배운(?) 바 있지 않은가.


분명 장담컨대 이번에도 지나친 교육열 내지 열악한 교육예산 정도를 논하다 그냥 사그라들고 끝이 나겠지. 젠더갈등 논의하면 가부장제'만' 죽도록 패다 끝나는 것처럼. 어디 하루이틀인가? 



+짤 설명  : 지난 세기말 끗발 날렸던 만화 'Great Teacher Onizuka(한국명 '반항하지마)'는 당시 학원물의 정석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교사이긴 하지만 학창 시절 양아치 날라리가 어찌어찌하다 양아치 날라리인 '그 상태 딱 그대로' 교사가 된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그는 절대 '교사집단'을 대변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를 제외한 다른 교사들은 더러운 악의 축. 권위주의를 추구하는 압제자로만 묘사되며, 정의로운 날라리 주인공이 사악한 교사들을 응징하는 방식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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