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들의 혁명 1

여성의 해방과 남성의 해방

by 박세환

영화 '조커'는 그간 신좌파 스피커가 애써 말하지 않으려 했던 새로운 약자의 서사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분명히 약자인데 주류 인종에 남성, 성인이라 종래의 신좌파 약자 판별 도식으로는 잡히지 않았던 이들. 그리고 대안 우파 현상을 논 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이름. '인셀(이성에게 자신을 어필하지 못해 연애 시장에서 도태된 남성을 이르는 말)'이다.


인셀이 서구사회만의 문제였으면 이 영화가 한국에서까지 그렇게 흥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인셀은 서구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도 비슷한 부류의 수많은 청년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 했을 뿐.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보통 '찐'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 스스로가 그 '찐'이어서 아는데, '찐'들이받는 가장 큰 고통은 뭐니 뭐니 해도 관념적 소외, 간단하게 사회적 냉대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분명 약자이다. 패배자일 수 있고, 무능력자에 정서적 결함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머저리, 도태자, 폭탄, 기생충, 구타유발자. 그래 다 좋다. 그럼에도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 아닌데, 우린 '가해자'는 아니다.(진짜로 조커처럼 돼버리지만 않는다면.)


웃기는 점은, 누군가를 제대로 가해할 수조차 없었던 이 찐들이 무수한 관념적 소외 속에 종종 '가해자들'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돈을 바라고 온 게 아니에요. 그냥 안아주시면 안 돼요?")


과연 '찐'들은 이러한 관념적 소외로부터 벗어나, 사회로부터 혐오가 아닌 최소한의 연민이라도 받게 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찐'들과 무척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으나 그것을 당당히 극복해 나갔던(그리고 지금은 다소 과잉되어버린)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20191021_124037.jpg



전근대적 사회에서 여성은 항상 항상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지곤 했다. 그 여성들 중에서도 특히 하찮게 여겨지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몸이 더럽혀진 여자들'이었다.

전근대적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정절'이기 때문에, 이 정절을 지켜내지 못한 여자는 더럽고 불결한, 그리고 불'경'한 존재로써 언제나 사회적 기피를 받아야만 했다.


전근대 가부장제의 특성상, 사회가 전근대적일수록 "여성의 몸이 더럽혀지는 것"은 여성 본인의 의지와 별개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몸이 더럽혀진 여자는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되곤 했다.


혐오를 하고 싶은데 혐오의 근거가 없으면 애매하니까 사람들은 그 근거를 애써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비록 남자가 손을 댓을 지라도 애초에 품위를 유지하기 못하고 언행을 방정맞게 하여 흐트러진 모습을 보임으로써 남자의 정념을 자극한 여성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정당한 이유가 되건 안되건, 어쨌건 '그녀들'은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모멸과 멸시 속에서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현대의 페미니즘 운동은 바로 이런 모순들 속에서 싹을 틔웠다.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우리는 약자였고 피해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약자이고 피해자였을 뿐인데, 어째서 가해자들보다도 더 혐오받고 외면받아야만 하는가?!


아직 전근대적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구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저항의 목소리들을 불경하게 생각했다. 섞이기도 싫은 더럽고 불경한 이들이 낯짝 두껍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자신의 인권이니 권리니 운운하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구시대의 사람들'은 이 끔찍한 생물들이 스스로 수치를 자각하고 알아서 땅속으로 꺼져 주길 바랬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수하고 끈질긴 투쟁의 끝에, 결국 세상은 비로소 "타의에 의해 정절을 잃은 여성은 연민의 대상일지언정 혐오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그리 되어선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여전히 이 사실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던 '구시대의 찌꺼기들'은,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시간의 흐름 속에 쓸려져 나갔으며, 얼마 남지 않은 이들 역시 오래잖아 그렇게 될 것이다.


-To be continue


20191021_123840.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유주의는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