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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Oct 25. 2023

'특별함'에 대한 집착으로 세상을 망친 '진보'

힙스터 강박이 가져온 무리수들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과 승상 소하는 최상의 콤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들도 늙고 병들어 죽게 되고 혜제와 조참이 각자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문제는 소하를 계승해 승상이 된 조참이 일을 너무 안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조참의 태만을 보다 못 한 황제 혜제가 조참을 직접 찾아가게 된다.


자신을 향해 왜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황제를 보며, 조참은 뻔뻔스럽게도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하는 그 질의응답의 내용이다.


조참 : 폐하. 폐하께서는 선대인 고조폐하와 자신을 비교해 보건대 누가 더 우수하다고 여기십니까?

혜제 : 고조폐하께서 훨씬 훌륭하셨소.

조참 : 그럼 폐하께선 소신의 전임자인 소하 승상과 소신을 비교해 보건대 누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혜제 : 솔직히, 그대는 소하보다 좀 못 한 거 같소.


여기서 이어지는 조참의 발언이 걸작이다.


조참 : 자, 폐하께서는 전임자인 고조폐하만 못하고, 소신은 전임자인 소하보다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특출남을 보이려고 무리할 게 아니라, 그저 전임자들이 남긴 법도를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옵니까.





특별함은 좋은 것이지만 모두가 언제나 항상 특별할 수는 없다.(모두가 특별해지는 순간, '특별함'은 더 이상 '특별함'이 아니게 된다. 모두가 서울대생인 세상에서 서울대생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서울대생'일 수 없다.)


사실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죄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것일 뿐이며, 사실 평범한 게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니까 '평범'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세상의 대부분은 '특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 평범함을 잘 유지하기만 해도 세상은 충분히 잘 돌아간다. 소하만 못 해도 결국 나름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조참처럼 말이다. 문제는 그런 평범함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 자아가 비대하고 강했던 이들이 너무 많았다는 데에 있었다.



어차피 세상 대부분은 '특별할' 수 없는데 나는 어떻게 서건 '특별하고' 싶을 때, 사람은 반드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무리수들은 반드시 세상을 망친다.




프랑스 대혁명과 근대의 시작은 뭐로 보아도 '특별'했다. 그 이전시대에는 세상이 잘못되어 혁명이 일어나도 기존의 왕을 새 왕으로 교체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프랑스혁명은 너무나 달랐다. '공화정'이라는, '세속주의'라는, 그리고 '근대적 자유주의'라는 전례 없었던 새로운 요소들이 마구 도입되었으니 말이다.


프랑스를 이어 다른 서구 국가들도 이 '근대화'를 따라갔고, 이렇게 근대화된 국가들은 하나같이 과거와 이격 된 엄청난 강대국들로 떠오르게 된다. 그렇게 막강해진 '근대 서구국가들'은 다른 대륙 다른 문명권들을 압도하게 되었고 그렇게 인류 전체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 새로움은 너무 너무나 특별했기에, 역사가들은 '근대'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이 시대와 이전 시대를 구분하게 되었고 '근대적' 혹은 '전근대적'이라는 용어가 역사학계의 전문용어를 넘어 일반정치까지 퍼져나가 지금까지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프랑스혁명과 근대의 출발이 인류에 가져다준 그 엄청난 충격과 뽕은, "인간은 언제나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냈다.


'전근대'에는 선대의 지혜를 물려받아 잘 계승해 나아가는 게 미덕이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수구 꼴통의 미덕으로 전락했다. 후대 젊은이들이 선대와 다른 새로움을 들고 나와 선대의 '수구꼴통들'과 맞서 싸우는 게 새로운 미덕이 된 것이다. 바야흐로 '진보'라는 정치 개념의 시작이다.(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썩 훌륭해도 선대와 다를 게 없다면 그건 '진보'라고 할 수 없다. 진보는 단순히 훌륭함을 넘어 선대와 구분되는 '특별함'을 갖춰야만 성립되는 개념이다.)




"우리 세대는 선대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미덕을 만들어 선 보여야만 한다."이 관념은 엄청난 정신적 압박이 되어 '진보'라는 이름으로 후대의 청년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되는데, 전술했듯 세상은 언제나 항상 새롭거나 '특별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모두가 언제나 항상 특별할 수는 없는데, 우리는 언제나 항상 특별함을 제시해야만 한다면 나오는 게 뭐라고? 그래, '무리수'


프랑스혁명이 가져다준 '근대의 특별함'으로 인해, 그때부터 세상은 무수히 많은 '진보적 무리수들'로 신음을 앓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공산주의였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그 실험은 결국 실패로 종결되었다.


그래도 공산주의는 세상에 나름 긍정적 의미를 남겼다고 본다. 당신이 날 좌빨이라고 욕을 하건 말건 노동인권 내지 복지라는 측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실 공산주의 체제가 '어쨌든' 실패로 종결된 이후 남겨진 진보쟁이들의 행보에 있다.



특별함의 총체였던 공산주의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우리 진보쟁이들은 언제나 항상 특별해야만 하는데 그 특별함이 실패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특별함'을 피력해야 하지? 이때부터 별의별 무리수들이 마구마구 남발되기 시작한다.


진보쟁이들은 특별함이 필요한 사회적 부당함을 억지로 쥐어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너는 사회로부터 부당한 억압을 받고 있어! 너는 그 부당함을 깨우쳐야만 해! 의식화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탄생한 천태만상이 무엇이었는지는 다들 머릿속으로 떠 올리는 게 있을 것인데, 우리는 그것들을 보통 페미 피씨라고 한다. 정치적 올바름(피씨)이라는 용어가 공산권이 붕괴한 9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당연히 그런 무리수들에 대한 반발도 터져 나왔다. 문제는 그러한 무리수에 대한 반발들 초자 무리수를 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젠 아예 전근대 봉건왕조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범람하게 되었다.


'특별함'을 쟁취하기 위한 병림픽이 세상을 아예 병자들의 향연으로 뒤덮어 버린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특별함에 대한 강박'과 그 강박이 만들어낸 무리수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바로잡고 싶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러한 무리수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그 무리수를 청소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일종의 새로움'이라는 형식을 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기존의 무리수들을 청소하고자 하는 그런 '새로운' 시도들은 어쩌면 미래에 '새로운' 문제들을 양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후대는 그러한 문제들을 빌미로 우리를 다시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 과정은 무한정으로 반복될 수도 있다. 각 시대는 그 시대만의 '새로운' 문제들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어쩌면 그러한 반복이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다시 말 하지만, 세상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는 명확히 하고자 한다. 각 시대마다 새로운 필요에 의해 새로운 투쟁이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세상의 순리라 한들, "나는 새롭고 특별나야만 해!"라는 정신적 압박감이 투쟁의 동력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보는 새로움에 대한 힙스터적 강박이 아니라

순수한 쓸모에 의해서 일어나야만 한다.


태초에 '바퀴'라는 물건을 만들어낸 장인은 그 특별함으로 세상을 진일보시켰지만

그냥 전근대도 아니고 신석기시대 사람이었을 그가 "나는 특별해야만 해!"라는 정신적 압박감으로 바퀴를 개발한 건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필요가 생겼고, 그 필요가 진보로 이어진 것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진보'는 '새로운 평범함'으로써 '기존의 평범함'의 위치를 대체한다.


이것이 진보의 순리이다.



아마 '누군가'는 새로움을 만들어내겠지만

'모두가' 새로움의 선봉일 수는 없고

그렇게 강요되어서도 안된다.


+아예 바퀴의 필요성조차 거부하고, 계속 살던 데로 힘들게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것은 '수구'이다. 이쪽 관점을 가장 잘 보여준 이는 전통주의 우파들의 거장이며 러다이트 운동가이고 인류문명을 향한 테러를 일삼던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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