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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Oct 27. 2023

성이녹과 박제된 예수 이야기

"그 문구가 왜 그렇게 끌려요?"

"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수가 나와야 하며, 그 새로운 예수는 박제가 되어버린 지난 시대의 예수에 맞서야만 한다."


페친 성이녹이가 쓴 이 '시(詩. 본인은 이를 시라고까지 생각 안 할는지 몰라도 필자는 이걸 시라고 생각한다. 단연코 시 맞다ㅇㅇ)'를 필자가 유독 좋아했을 때, 많은 이들은 하필 이 시구가 필자에게 왜 그렇게 와닿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좀 말해 보고자 한다.


혹자는 말한다. 저 시구는 그냥 "후대가 못된 선대 세대에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단순하다 못해 흔해 빠진 서사를 표현한 거 아니냐고. 정말 1차원적으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게 맞다. 저 시구의 원 관념은 그냥 "후대가 못된 선대 세대와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선대와 맞서는 후대'라는 뻔한 레퍼토리를 중2병스럽게 치장한게 전부였다면, 당연히 필자가 저 문구를 그렇게 오랫동안 뇌리에 남겨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시, 아름다운 문장이란 무엇인가에 딱 한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다지만, 여러 가지 요건 중 하나라고 보는 게 함축성이다. 짧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시킬 수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필자가 저 시구를 유달리 마음에 들어 했던 역시 그 함축성 때문이다. 저 시구에는 엄청나게 방대한 내용이 함축되 들어가 있다. 그것이 필자가 저 문구를 유달리 좋아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1. "우리는 '예수에' 맞서야만 한다."


구술했듯, 새로운 자들이 낡은 자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류의 서사는 정치시장에서 차고 넘치기에, 당연히 그 자체로는 특출 날 것이 없다. 하지만 원작자는 여기서 하나의 변수를 추가한다. 우리가 맞서야 할 대상이, 흔한 악당이 아니라 무려 예수이다..! 왜 하필 예수일까? 예수는 '좋은 것' 아닌가? 여기가 첫 번째 포인트. 


'예수'는 당연히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저 좋기만 했으면 우리가 이에 맞서야 할 이유도 없다. 한 때 좋았을지라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맞서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통찰이 들어간다. 원작자는 '맞서야 할 대상'을 흔해터진 마왕이나 악마가 아니라 '예수'라고 표현함으로써, 지금은 맞서야 할 대상이 되었지만 저들도 한때는 위대했음을, '예수'였음을 어필한다. 그냥 악당이 아니라 '한때는 예수였던' 악당이라는 것이다. 이게 첫 번째 '함축'이다.




2. "우리는 '박제된' 예수에 맞서야만 한다."


한때는 예수였지만 지금은 아닌 악당이라면, 보통 일반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떠 올리는 수식어는 '타락한'이다.(블리자드..;;) 그래서 저 문장이 "우리는 타락한 예수와 맞서 싸워야 한다."정도로 끝이었다면, 그냥 인상적인 문구 하나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원작자는 그러지 않았다. 원작자는 '타락한'이라는 흔해터진 수식어가 아니라, '박제된'이라는 수식어를 애써 고집했다. 왜? 여기가 두 번째 포인트.


'타락'은 변질을 의미한다. '박제'는 정 반대로 불변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작자는 '타락'이 아니라 '박제'라는 용어를 고수함으로써, 저들의 죄악은 변화가 아니라 정 반대로 변화하지 않음에 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역설적으로 '그들'은 변한 게 아니라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쁜 놈들인 것이다.


항상 반복하는 말이지만,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유효함을 입증하려는 이는 세상과 함께 공명하며 그 자신도 끝없이 바뀌어야만 한다. 하지만 저들은 그러지 못했고, 그들이 가장 위대했던 순간(68 혁명 or 80년대 민주화 투쟁, 가부장제를 향한 투쟁, etc...)에 고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타락이 아니라 고착이 더 큰 문제였다. 이는 페미니즘을 떠 올려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세상은 변했는데, 한 때 투사였던 저들의 인식세계는 흘러간 과거의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3. "'새로운 예수'는 박제된 예수에 맞서야만 한다."


원작자는 '그 박제된 예수'와 맞서야 하는 주체를, 그냥 손쉽게 '우리'라고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애써 '예수'라고 표현함으로써 앞뒤의 음율을 맞춘다. 여기가 세 번째 포인트.

왜 그냥 '우리'라고 표현치 않고 '새로운 예수'라고 표현했을까? 


예수는 위대하다. 우리의 저항도 그 예수만큼 위대할 것이며, 또 그러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다른 대상도 많다. 부처, 공자, 무함마드 등등. 이 모든 걸 물리고 여기서 애써 다시 예수를 재소환한 것은 당연히 단순한 종교적 이유 따위가 아니다. 물리쳐져야 하는 대상과 이를 물리치는 주체를 모두 '예수'라는 이름으로 동일화 함으로써, 저들도 '한 때는' 우리였음을, 그리고


.. 우리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박제된 흉물이 될 것이고 흉물이 된 우리 역시 십자가에 매달린채 불태워져 처단당할 것이라는 비극적인 운명과 처절한 각오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 역시 '그들'처럼 박제되었을 때, 우리가 처단되지 못한다면 그땐 박제된 '우리'에 의해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큰 비극이다.)  





4. "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수가 나와야 하며, 그 새로운 예수는 박제가 되어버린 지난 시대의 예수에 맞서야만 한다."


어쩌면 이 과정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수'라는 문구는 이 과정이 영구적이면서 또 영구적이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는 확정된 해피엔딩을 꿈 꾸며 저항하고 투쟁하겠지만, 지금까지 앞서간 선대가 그러했듯 '그 확정되고 고정된 엔딩점'에 도달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여기서 '예수'라는 어휘의 의미가 다시 한번 빛난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란 확정되고 고정된 엔딩점이다.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원작자는 신성모독적 이게도 이 부분을 부정한다. '고정되고 확정된 예수'를 부정하고, '끝없이 새롭게 재갱신되는 예수'를 가정함으로써, 그 끝없는 가변성과 이로써 유발되는 영원한 투쟁만이 인류의 유일한 불변성임을 최종적으로 못 박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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