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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Nov 02. 2023

삼국지와 문(文)의 지배

실제로 붓은 칼보다 강했다.

무신(武神) 여포의 죽음. 그리고 유비의 형주입갤 이후 펼쳐지는 서서-제갈량-방통 이벤트들은 삼국지의 주도권이 무(武)에서 문(文)으로 이행됨을 묘사한다.(제갈량 등용 후 관우와 장비가 투덜거리는 장면이 특히 상징적이다.) 오나라 손권 동네도 비슷한데 뼛속까지 순수 무사였던 여몽이 글을 깨우치는 괄목상대 이벤트 내지 백면서생 육손이 한방에 대장군급으로 진급하는 장면(다른 무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을 통해 오나라에서도 무에서 문으로의 주도권 이행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정보 한당 황개 조무와 함께하던, 철~저하게 무사집단이었던 손견 시절을 떠 올려 보면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이한 건, 정작 조조동네에선 이 이행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이다. 유독 조조동네에서만, 조직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문사들이 탄압받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순욱 순유의 죽음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조무리는 당시 문(文)을 지배하던 주류사조인 유교사조(지금으로 치면 페미 피씨)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조무리는 유독 유교(페미 피씨) 패거리와 척을 져 왔고 이 갈등은 조조의 위공-위왕 등극 시즌에 들어서 더욱 극적으로 표출된다. 애초에 한(漢)을 떠나 위(魏)를 세우려 했던 자체가, 유교(페미 피씨)한테 속박받지 않는, 좀 더 반페미 반피씨하기 자유롭고 새로운 그룹을 열어젖히려 했기 때문이었기에 당연히 기존 유교 문(文) 집단의 반발이 극심하게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순욱 순유의 죽음과 더불어 두 집단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고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위나라는 유교(페미 피씨)와 척을 졌으면서도 자신들과 척을 진 유교 문벌 세력들을 끝없이 두려워했다. 이게 잘 나타나는 장면이 조조 아들 조비의 등극과정. 당시 조비의 라이벌은 조창과 조식이었는데, 군부 내 나름 튼튼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던 동생 조창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던 조비가(실제로도 별로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군대를 이끌고 수도 문 앞까지 진격했음에도 조비는 개무시로 일관.) 문벌세력들한테 나름 잘 먹히던 동생 조식만큼은 유독 경계하며 끝없이 해코지하는 모습은 이 문벌 세력에 대한 위나라의 경계심을 잘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여튼 위나라는 문벌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에 믿을 거라곤 철저하게 무력밖에 없었다. 위나라는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한 무(武)의 나라였던 것이다. 때문에 유일한 믿을 구석인 병권만큼은 결단코 조씨 일가의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던 건데, 그너무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병권이 넘어가자 궁극적으로는 나라 전체가 사마일가에게 헌상되는 결과로까지 나아간다.





문무의 대립과 우열을 잘 보여주는 촉나라의 이벤트가 제갈량 사후 양의와 위연의 대립. 촉나라의 무를 대표하던 위연이 결국 문을 대표하던 양의에게 밀려 반역자로 치부되고 최종적으로 권력다툼에서 이탈하게 되는 건 위연이 수도 성도의 문사집단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비가 입촉을 할 때의 이벤트 한 점.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거의 승기를 잡아가고 유장이 성도에 홀로 고립되어 있을 때 허정이라는 문사 하나가 성벽을 넘어와 유비 진영에 투항을 요청했다. 그리고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한다.


"허정의 명성은 허명입니다. 하지만 허명도 명성이라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일단 받아놓으시죠."


명성이 허명이라.. 이게 무슨 말 이냐면, 능력도 없고 별 볼일 없는 인물임에도 그저 페미 피씨 무지개 활동 같은 거 열심히 하고 유튜브 나와서 남페미짓하고 그런 식으로 진중권 유시민 같은 이들에게 인정받아 명성을 쌓았다는 의미이다.




유교(페미 피씨) 문사 집단으로부터의 인정 여부를 떠나 조조라는 인물 자체가 너무 사이코패스였기 때문에 차피 천하의 인정을 받기는 어려웠다. 서주 대학살이야 말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안 알려졌지만 원소술 형제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십만이 넘는 포로들을 구덩이에 파묻어버리는 일도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조조가 민심의 선택을 받을 여지는 소멸한 것이라 봐야 한다. 유비가 신야성에서 강하로 달아날 때 무려 십만이 넘는 백성들이 따라나서는 유래가 없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정작 유교 문벌세력은 인간이길 포기한 이러한 학살극 보다도 조조가 페미 피씨 정책 안 해준 거, 페미 피씨 인사들 배척한 걸 가지고 더 트집을 잡았다는 게 웃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당대 문사 중 서주의 학살을 문제 삼았던 건 순욱 정도였다고 한다..)


여튼 이렇게 조조세력과 척을 진 유교(페미 피씨) 문인 세력들은 촉나라와 오나라를 지원해 주었고 이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촉과 오가 두 세대 넘도록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유교(페미 피씨) 문인 집단의 위나라 혐오는 삼국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질기게 이어져 결국 멸망한 촉나라를 승리한 위나라보다 더 정통왕조로 배치해 기어코 삼국지의 주인공, 역사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조조도 똥망한 민심을 극복하려 나름 고심했던 것 같다.


여포를 정벌할 때, 이미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음에도 별 볼일 없는 유비세력을 자신의 편에 애써 추가시킨 건 사실 조조가 서주에서 민심 폭망이라는 걸 아니까 서주 민심으로부터 인정받던 유비를 끼워서 정치적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유비가 서주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요구할 여지를 만들어주었고 결과적으로 유비가 반기를 들어 서주를 다시 재장악해 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추가로 원술을 정벌하는 중 진격하는 군대를 향해 "농번기이니 백성들의 논밭에 해를 끼쳐선 안된다. 곡식 한 톨이라도 해를 끼치는 이는 목을 치리라!"라고 엄포했다가 말이 발을 잘못 디뎌 밭을 뭉개게 되자 부하들에게 자신의 목을 치라고 하고, 차피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결국 못 이기는 척 머리카락을 잘라 목숨을 대신하겠다 하는 대목이 나름 민심극복을 위한 조조의 정치적 쇼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쇼들도 민심회복에 별 도움은 안 되었을 것이다. 이후 원술을 정복하고 나서 수 만의 포로를 학살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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