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어렸을 땐 삼국지를 보며 전장에서 적을 잘 찢어 밝기는, 그렇게 눈에 확 띄는 인물들을 좋아했다. 뭔가 얌전하면서도 맹숭맹숭한 유비 같은 인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유비는 관우 장비 등이 만든 촉이라는 나라에 그냥 올라탄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자라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
.. 필자가 선호했던, 전장에서 적을 잘 찢어발겨서 그 전공과 명성이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캐릭터 치고 정작 정치적 리더로서 성공한 사례가 잘 없더라. 삼국지뿐 아니라 역사 전체를 둘러보아도 잘 없었다. 특유의 공격성으로 전장에서 적을 잘 찢어서 명망을 얻은 이들은 정작 그 자신이 지도자 자리에 오르면 조직을 매끄럽게 잘 이끌어가질 못했다. 그 조직은 사람들이 세고, 떨어져 나가고, 분란이 발생하고, 고립되어 자멸하곤 했다. 대표적인 게 삼국지에선 여포고 역사 전반으로 보자면 항우.
특히 항우의 경우가 특징적인 게, 항우는 인생 전반을 걸쳐 보아도 전장에서 패배한 일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항우는 정말 끝없이 이기기만 했다. 이기고, 또 이기고, 그렇게 패 죽이고 또 죽였는데도 이상하게도 적은 하나를 죽이면 둘이 더 튀어나오는 저그 떼처럼 줄지를 않고 늘어만 갔다. 결국 항우는 그 쏟아지는 승전보 속에 파묻혀 지치고 질식해 죽었고, 천하는 평생을 그 항우에게 먼지 나게 처 털리고 다녔던 유방에게 돌아갔으며, 그 유방의 한나라는 400년이라는, 중국 왕조치곤 보기 드문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며 오늘날 중국인(한족 漢族)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항우는 죽으면서도 하늘에 대고 억울해했다. 나는 너무 잘 싸워서 평생을 이기기만 했는데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는 이렇게 죽어야 하고 나한테 맨날 처 털리기나 했던 저 하찮은 유방 따위가 최후의 승자로 등극하게 되었냐고 하늘을 향해 억울해하며 죽었다. 이건 부당하다! 나는 억울하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 그러게? 왜 그렇게 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싸움은 알았지만 정치는 알지 못했으니까ㅇㅇ 싸움의 목적은 적을 패 죽여서 무력화시키는 것이지만 정치의 목적은 최대한의 사람들을 포용해서 내 편을 늘려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포나 항우류의 인물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을 베어 넘기면 넘길수록 적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갔던 것이다.
싸움이라는 게 어느 정도 재능이 받추어주어야 잘할 수 있는 것이듯 정치 역시도 그러한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끌어안아 호감을 만드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인격적으로 타고나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람을 품는 그 '마음'이 없이 그저 얄팍한 정치적 쇼맨쉽과 감언이설로 상대를 구워삶는 건 한두 번은 가능할 수 있어도 평생 지속가능하진 않다. "저거 다 쇼 아니야?"라고 시니컬하게 비꼬곤 하지만, 그 '쇼'도 평생을 지속된다면 그건 더 이상 쇼가 아니라 인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데 바로 삼국지의 유비가 그러했던 것이다.
정치사회 논의의 장에서 내가 동경했던 건 토론장에서 적을 잘 찢어발기는 것으로 유명해진 논객들이었다. 너무 멋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바뀌어가는 중인데, 그렇게 공론장에서 상대를 잘 찢어발기는 것으로 명망을 얻는 인사 중 조직의 리더로 크게 성공한 사례가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인사들이 명성을 바탕으로 조직의 리더가 되었을 경우, 그 조직은 잘 굴러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내부에서 딴 소리들이 나오고, 분란이 일어나 결국 조직 전체가 와해되거나 당사자가 리더 자리를 내려놓고 내려와야만 했다.
'그런 류'의 인사들은 대체로 인간관계가 썩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최선의 경우에도 조언자의 자리까지만 적응할 수 있었다. 전술했듯 조직의 리더로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고 개인적인 명망에 기반해서 원맨팀으로만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 아무래도 그들이 가진 특유의 공격적 기질이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끌어안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 근래 내홍을 겪은 '모 정당'을 바라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이 좋은 격변의 시기에, 그 조직은 계속해서 세가 줄어들기만 할 뿐 좀처럼 커가질 못했다. 그리고 내홍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내홍의 자세한 내막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조직은 '전장에서 적을 잘 찢어발기는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이 이끌고 있다. 나 역시 그 화려한 전공에 혹해 그에게 많은 호감과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제는 좀 내려놓게 될 것 같다. 꽤 좋은 포지셔닝을 가지고 있고, 매번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도 왜 그렇게 '저들'을 미워하는 이들이 많았는지, 왜 그의 주변에선 시끄러운 불협화음이 마를 날이 없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관우, 장비, 위연, 법정, 방통, 제갈량.. 얘네들 데리고 조직 운영해서 1년 동안 내분 안 나게 유지만 할 수 있어도 이미 그것 만으로도 지도자의 자질이 충분한 것 아닐까 생각이 든다. 미연시 백날천날 해 봐야 실제 연애는 1도 못해서 방구석 찐따 못 면하는 것처럼, 실제로 사람을 만나고 다루는 건 결코 삼국지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어라? 얘 충성도가 3 내려갔네? 금 300 포상해서 다시 올려야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