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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정치사상과 관계정리에 대한 이야기

아름다운 이별을 향하여

by 박세환

오랜 페친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산업화도 민주화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묻혀있는 목소리들을 찾아내고 대변해 보자는 게 저와 공이들 친구들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번 겨울은 꽤 춥게 다가옵니다.


이 정국이 있기 전까진 우리와 소통의 여지가 있는 40%가량의 중도층 인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극단적 내전정국에선 이들도 결국 하나둘씩 자신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진영으로 합류해 한 편을 이루게 되고, 우리처럼 마지막까지 편을 잡지 않는 이들은 이제 전 인구의 10%가 채 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을 허용치 않는 이들은 세상을 오징어게임처럼 OX로 나누려 하며 이 구도를 거부하는 이들이 보통 가장 먼저 제거됩니다. 편을 거부하는 이들은 가증스러운 기회주의자, 쿨병 걸린 중립충, 철없고 답은 더 없는 이상주의자 등등으로 매도되어 양쪽으로부터 먼지 나게 처맞고 쓰러져 갑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편을 정하길 거부하다 양쪽 모두에게 짓눌려 소멸되어 버린 우크라이나 저항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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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국이 시작된 이후 제 주변에서는 끝없이 혼란이 일어나며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정치적 목소리를 만들어보잡시고 작은 모임이나마 만들어놓은 상황이라 아무 입장표명 없이 시국을 죽은 듯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모두에게 민감한 상황인지라 어떤 입장을 내어도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전부를 만족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구요. 결국 양 끄트머리 쪽에서부터 갈등의 먼지구름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누군가는 친구의 범주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꾸준히 이어지지요.


그럼에도 저는 위에 언급한, 저 '쿨병중증 중립충질'을 그만할 생각이 없습니다. 윤석열 일당이 어떤 식으로 건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제가 민주화 진영의 일부가 되겠다는 의미는 아니며, 여전히 국민의힘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싸잡아 개X기 취급할 생각도 없습니다.
애초에 산업화나 민주화들이 정치시장에서 팔아먹는 내러티브들은 각자 치명적인 하자가 있어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못됩니다.(충분히 받아들일 괜찮은 쪽이 있었으면 진즉에 한 편 했겠지. 중립질 같은 거 왜 하냐)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서사를 별도로 만들어 가자는 게 공이들의 약속이었고 또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킬 수 있을 때까진 이 신조를 지켜 나갈 생각입니다.


저는 "차피 이판사판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야! 니편 아님 내편! 적 아님 아군! 팔짱 끼고 관망하는 나약한 지식인이 아닌 앞뒤 안재고 뛰어드는 돌격병의 정신!" 이런 마인드를 매우 싫어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 더욱 절절하게 체감하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세상 전부를 다 포용하고 갈 수는 없다.'라는 깨달음이죠. 내가 내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그 틀에 들어가지지 않는 누군가는 생기기 마련이며, 차피 될 수가 없는데도 이를 억지로 낑겨 넣으려 하다 보면 결국 득 보다 실이 더 많은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안 되는 하나를 고집하다 다른 다섯까지 잃게 됩니다.


그래서 만남 못잖게 이별이 중요합니다. 이별해야 하고, 이별할 수 있을 때 잘 이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헤어져야 훗날 상황이 바뀌어 다시 재회할 여지도 남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별이 너무 아쉽다고 안 되는 걸 억지로 주리 째고 있으려 하다 보면 결국 서로 할퀴고 물어뜯다 평생 원수가 되어버리고 이 과정에서 엮인 주변 사람들까지 피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말 하지만 이별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잘 이별해둬야 합니다.




서론이 터무니없이 긴 반면 본론은 간단한데, 이제부터는 삶 속에서 '안 되겠다'싶은 관계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정리해나가려 합니다. SNS에서도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이별 조치를 취해나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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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인 악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의 신념과 저의 신념이 맞지 않는 것뿐이죠. 그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뿐이고, 저와 갈라지고 나서도 부디 하시는 일 잘들 풀려 나가길 미리 기원하겠습니다.(꾸벅)


그리고 지금 이 시국 양쪽에서 두들겨 맞고 계시는 '중립충' 여러분들, 혹은 마지못해 양 진영에 소속되어 있지만 가면 갈수록 미쳐 돌아가는 동료들을 보며 심신이 심란하신 여러분들, 분명 제법 있으실 거 같은데 우리들끼리 더 많이 연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이 어려운 시국을 함께 헤처 나가길 조심스레 청해봅니다.

지금은 어쭙잖게 입 털었다가 진영 내에서 반역자로 몰려 처단될까 두려워 입들을 다물고들 있겠지만 언젠가 정국이 안정되면 양쪽에서 짓눌리며 숨죽여왔던 목소리들이 다시 터져 나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같이 잘 버텨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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