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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Dec 14. 2022

디자이너의 다이어리가 오픈되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집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수년전, 한동안의 작업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계기가 생겨 그 동안의 작업들을 정리할 즈음, 지인으로부터 부탁이 들어왔다. 20평짜리 작은 아파트인데, 업체에 맡기려다 보니 원하는 것을 하려면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 마침 자기가 두어달정도 시간여유가 있으니, 직접 인테리어를 해보고 싶은데 도와줄수 있냐는 것이었다. 아니, 인테리어 작업이 한두가지 팁만 알려준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디자인부터 마감까지 조언해줄것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이제 좀 쉬려는 나에게 염치없이 이런 부탁을 하나 얄미웠다.


본인이 작업하게 되면 신경쓸 것들이 생각보다 많고, 그나마도 실수를 하게 되면 아끼려는 돈보다 오히려 많은 금액을 날릴 수 있으니, 믿을 수 있는 디자이너를 소개받아 그 디자이너를 믿고 맡기는 것이 나을거라고 애둘러 거절했다.


작업인테리어 작업이라는 것이, 단순히 수학공식에 숫자를 대입해서 답을 얻어내는 것처럼, 프로세스가 딱 정해져서 그대로만 진행하면 원하는 답이 정확히 떨어지는 그런 작업이 아니기에, 경험있는 디자이너나 현장소장이 작업한다 할지라도, 지속적인 체크가 필요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꼭 몇 가지는 잘못된 결과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업체들만 소개해주면 본인이 직접 컨트롤해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것만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난감하기도 하고, 분명 뭔가 잘못되면 나에게 연락해서 SOS를 청할 수 있으니 부담없이 용기를 갖는 것 같아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하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러마고 했다.



인테리어 공사는 같은 자재를 시공하더라도,각각의 현장마다 그 시공방법과 순서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고, 시공환경에 따라 자재비나 시공비의 산출법이 다른 경우도 많다. 또한 가장 복병인 시공자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정리된 (일을 왠만큼하고 좋은자재를 적당한 가격에 공급하는) '업체리스트'는 디자이너나 현장소장들에겐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그러나 그런 핵심정보를 건네준다 하더라도 작업의 프로세스를 모르는 그에게, 주요재료만 건네주고 레서피를 알려주지 않는 못된 쉐프가 되는 것 같아서, 어떤 작업을 하는지 알고 작업순서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작업 전 같이 현장체크를 하기로 했다.


사전작업으로 현장미팅을 하게 된 날 만난 그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현장 여기저기를 돌면서 이것저것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고, 또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의욕에 불타는 후배디자이너의 브리핑을 듣는 듯, 나도 모르게 그가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자재와 업체를 순서에 맞춰 머리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나온 클라이언트처럼 두리뭉실한 단어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어렴풋이 드러내고 디자이너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눈빛으로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안방의 몰딩은 화이트로 색상만 바꾸고, 벽지는 베이지빛이 살짝 도는 그레이컬러로 교체하고, 붙박이장의 내부구조는 쓸만하니 문짝만 가로줄무늬의 우드패턴으로 바꾸고...'



이렇게 그의 요청은 상당이 구체적이었고, 분명했다. 현장미팅이 있기 전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접하고 또 그것을 걸러내는 작업까지, 그의 고민의 흔적과 시간이 느껴졌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이렇게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내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자신감 넘치는 그가 어떻게 이 일을 마감해낼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사실 디자이너에게 인테리어작업 중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또한 어려운 것이 있다면,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다.



의뢰 받은 현장에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원하는 스타일의 것과 싫어하는 것, 가족들의 생활에 유용한 것과 방해되는 것들을 알아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인데, 이 과정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클라이언트가 자신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헤맨다거나, 혹은 생각할 시간과 여력이 없는 경우(일반의 클라이언트입장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디자이너들이 여러가지의 경우의 수를 두고, 수차례의 제안을 거쳐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추출해내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때,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어느 정도의 답을 찾을 때까지 이 일은 계속적으로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는 객관적 기준에서 제안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허용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보니 한두번의 미팅과 대화로는 원하는 것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어, 제대로 작업하는 디자이너들은, 그 초기과정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을 제대로 끈기있게 하는 디자이너는 그래서 비용이 높이 책정되는 것이다. 단순 이름값이 아니라.



그러니, 이런 긴 과정을 클라이언트 본인이 스스로 도출해 낼 수 있다면, 우리 입장에서야 씁쓸한 일이지만, 굳이 디자이너는 필요없지 않은가란 생각까지 하게되었다.


이런저런 복잡해진 생각을 한 켠으로 미뤄두고, 그가 요구한 사항들에 맞춰 공정을 나눠주고, 그 공정의 범위와 순서를 잡아주었다. 내친김에 자재상에 가서 자재도 선택하기로 했다. 나보다는 그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으므로, 나는 그가 고르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기만 했다. 물론, 간간히 나에게 물어오긴 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방향이 분명했고, 최종 자재선택도 훌륭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다시 책상에 앉아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하다 문득,



자신의 원하는 스타일과 방향이 분명한 클라이언트라면, 그들에게 그것을 실현시켜줄 기본적인 가이드라인만 제시해 주어도 그들의 두려움을 덜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리중이던 나의 작업일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작업일지에 담겨진 내용이 아니라 포멧이었다. 아파트인테리어 작업은 그 기간이 짧아, 보통 한달에 두세개 정도의 작업이 한 디자이너에게 맡겨지는데, 비슷한 패턴의 작업이 많다 보니, 현장별로 작업하기에 편하도록 일정한 형식의 작업일지(Working Diary)를 만들어서 활용하고 있었다. 이 작업일지는 현장소장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포멧화시켜 둔 것이어서 어느 정도만 손보면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고민에 부딪혔다. 현장작업을 위한 작업일지와는 달리, 디자인을 구상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사실상 특별한 포멧이 따로 없이 순전히 머리속에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는 있지만, 현장환경이나 클라이언트의 특성에 따라 변형되는 경우가 많고, 디자이너마다 추구하는 포인트가 다르다보니 디자인 프로세스는 디테일과 그 순서가 상이한 경우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어떤 하나의 포멧으로 제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야할까 길고 깊은 고민이 있었다. (이 글이 세상의 빛을 늦게 보게 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긴 고민끝에 내가 작업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어설프게 순서를 뒤바꿔서 새로이 작성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많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작업의 큰 순서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디자인프로세스를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시작으로,


디자이너의 기준에 맞춰져 있던 것들을, 일반인들이 스스로 디자인을 고민하고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포멧(Design Note)으로 재구성하고, 기존의 작업일지(Working Diary)와 연결해 현장작업까지 컨트롤 할 수 있도록 순서를 잡았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테리어공사라는 것이 하나의 공식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몇몇의 경우는 맞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지금까지 작업해온 수많은 작업들 중 대표적인 작업들을 기준으로 그 포멧을 추출하였고, 되도록 많은 공정을 포함하여 해당 공정별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첨부하는 작업도 병행하였으니, 일반적 범위에서의 작업을 소화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게 가득한 의지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시작할때의 의지와는 다르게 (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지만), 이 작업이 완성되기까지 4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여러가지 이유로 기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근간의 시들지 않는 '집'에 대한 관심과 노후화되고 있는 아파트들 많아지고 있음에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마무리하게 되었다. 한 지인의 귀찮은 부탁으로 시작된 작업이긴 하지만, 결국 그의 열정과 용기가 이 결과물을 탄생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


모쪼록, 자신의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험난한 과정에 뛰어들려는 모든 이들에게, 앞으로의 이 글들이 소중한 길잡이 혹은 동반자가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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