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해진 남매애

천사병에 걸린 동생과 천사로 태어나지 못한 누나

by 르미

최근 몇 년 간 동생의 상태가 안 좋아졌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고 온갖 잔병치레에 이골이 난 동생이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동생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들이 흔히 천사병이라고 부르는, 다운증후군이다.

나는 처음 동생을 남편에게 소개할 때에도 뭔가 늘 죄지은 것 마냥 동생에 대한 대화를 얼버무리기 바빴다.

먼 타지에 살기도 하고 동생과 전화 통화도 거의 안 하기 때문에 사실상 사회인이 되어선 크게 접점이 없었다.

내 앞가림하기에 급급했을 뿐 희미해지는 남매애에 대해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의 일이었다. 남편이랑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 동생과 식사를 하는데 동생이 계속해서 토를 했다.

동생이 워낙 감기에도 잘 걸리고 가래가 생기면 쉬이 뱉지 못해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남편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워낙 비위가 약한 사람이기도 하고 아직 장애 있는 가족에 대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밥도 삼키지 못한 채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애써 토사물을 치우고 닦으며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면서 문득,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동생이 엎지른 우유를 벅벅 닦던 어릴 적이 떠올랐다.

뭐가 부끄러웠는지 괜스레 친구들 보란 듯이 동생에게 씩씩거렸는데, 내가 그땐 그랬지 하면서 참 어렸다고 생각한 순간 남편의 눈을 보고 그때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나 아직 그때 감정 남아있구나. 이 기억이 지금 내가 가진 기질이나 성격에 영향을 많이 줬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남편 눈치를 살살 살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게 한 번 뿐이길 바랐는데, 어쩌다 식사를 함께 할 때면 어김없이 동생은 게워냈다.

매번 그러다 보니 식사 자리가 점점 두려워지고 나는 남편 눈치를 살피며 가능한 한 테이블을 분리해서 자리를 잡곤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야 하는 자리인데 너무 속상했다. 밥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도란도란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래도 나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최대한 자극이 없는 음식을 고르고 꼼짝없이 테이블에 앉아있어야 하는 외식보다는 집에서 밥을 먹길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 하는 아버지 때문에 밖에서 외식하는 일도 더러 있었는데, 어느 날, 생선구이를 먹으러 간 날이었던가.

나는 식탁에 수저를 놓을 때부터 나는 심장이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오늘도 동생은 토했고 어머니는 토사물을 치우기 바빴다. 남편은 다행히 가장 멀리 앉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소리에도 예민해져 또 밥그릇만 멍하게 보고 있었다.

그때였던 거 같다. 내 마음에 숨어있던 큰 돌이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인 게.

아버지는 식사를 못하고 있는 남편의 눈치가 보였는지 식사를 대충 끝내시고 동생을 데리고 식당을 나섰고 나는 이때다 싶어 어머니에게 내 마음을 쏟아냈다.

왜 동생을 그렇게 싸고도느냐고, 왜 큰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냐고, 왜 계속 끼고 키우냐고 엄마에겐 크고 작은 아픔이 될 만한 이야기를 나는 잘도 쏟아냈다.

성인 될 때까지 키우겠노라 마음먹었었다고 하면서, 이제 벌써 서른을 바라보는데 언제까지 부모님이 돌봐야 하느냐며 따졌다.

두 분 다 건강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3주마다 서울에 항암치료받으러 다니시고 조금 걸으면 쉽게 지칠 정도로 체력이 좋지 않은데,

아버지 건강이 나중에 더 안 좋아지면, 아버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제야 동생을 센터에 맡길 거냐며 쏘아붙였다.


어머니는 속상했는지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가셨다.

‘나도 사실 이야기 안 해본 게 아니다. 근데 너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절대 안 된다고 하신다.

그리고 지금 저렇게 밥도 못 먹고 토하는데 센터에 맡긴다 한들 누가 밥이라도 따뜻하게 챙겨나 주겠니. 센터에 가더라도 아픈 거 다 낫고 건강한 상태로 가야지.

우리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나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쏘아붙였다.

‘건강할 때 센터 상담도 가보고 왔다 갔다 들여다보고 해야 마음 놓이지. 나중에 가서 맡기면 들여다볼 힘도 없으면 어떡할 거냐고.

나중에 부모님 건강 다 안 좋아지고 거동 힘들어지면 나는 세명을 챙겨야 한다고. 나 좀 생각해 주라고.

그리고 나도 비위 안 좋은데 늘 동생 우선으로 생각하는 부모님 보면서 나도 너무 힘들다.‘


그리고 어머니는 받아치셨지만 그 이후에 들은 말들은 와닿지 않았다.

심플했다. 장애 형제를 둔 사람으로서 당연히 삼켰을 고통을 이해받지 못했다.

나는 사실 어릴 때부터 동생에게 가는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은 늘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알아서 잘해야 된다 라는 생각으로 살아왔기에 독립적인 개체는 되었으나 마음에 구멍이 커지면서 어느 한쪽이 기운 것 같은 사람으로 자랐다.

사회생활 하면서 앞만 바라봤던 내게 이 사건은 나를 돌아볼 브레이크가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어떤 딸이, 누나가 되어야 할까.

나도 점점 나이를 먹고 가족, 지인들의 마지막 순간을 접하며 점점 부모님과의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들의 자식이 되길 선택하지 않았듯 나도 내게 안겨진 이 운명을 포기하거나 모른 체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내 앞에 놓인 일들을 잘 해낼 수밖에.

그렇게 부모님이 나라는 자식을 떠올렸을 때 그 어떤 마음속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믿을 수 있게끔.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길, 그리고 부디 내가 그 안에서 무너지지 않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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