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기조차 싫었던 사람이 내 MVP가 될 수 있을까

2022년 나의 MVP에게

by 르미
입에 이름조차 담기 싫었던 사람이 나의 MVP가 될 수 있을까.



올해 초 다이어리에 적었던 나의 다짐을 들여다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이름조차 담기 싫어 자음으로만 적어놓았던 회사 선배의 이름과 이 사람을 강력한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나의 치기어린 결심이 현실이 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올해 나의 MVP에게 줄 선물을 몇주간 고심해서 골랐다.


나는 작년부터 함께 일하기 시작한 그 선배가 처음엔 너무 어려웠다. 성격적으로 둥글둥글하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인데다 일에 있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역량을 보기 보다는 성과에 집중하는 관점이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예를 들면 어떤 걸 질문하더라도 그 선배는 "OO씨, 이것도 몰라요?" 하는 식으로 반문했는데 자존심이 센 나는 겉으로 티는 안내려고 노력했지만 하루에도 수십번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선배라고 해봐야 겨우 1년 남짓 먼저 입사한 선배였는데 팀 내에서 인정받고 있었고 프로젝트들을 리딩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터라 나는 선배의 눈치를 보며 팀 분위기와 일에 적응하기 바빴다. 선배가 돌직구를 던질 때마다 내 마음에 벽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답답해 보이는 듯한 태도에 내 자존감은 매일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팀 내 모든 사람들은 다들 "어휴 왜 OO씨는 제일 바쁜 사이트를 맡고 하필 그 선배 밑에서 일하게 되서 그 고생이야"라고 하며 나를 위로했다.


한번은 회식 자리에서 눈치를 보는 나에게 술취해서는 "OO씨는 참 표현을 안하는 것 같애." 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누구 때문인데, 누구 눈치를 보고 그렇게 말을 못하고 있는건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고 1년간 참다보니 퇴근 후 집에가서 남편 얼굴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매일 매일 출근이 싫었고 내 가치가, 내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1년을 버티고 나서야 팀 내 인사 이동으로 팀장님이 바뀌면서 나에게도 빛이 들었다. 한참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기존 팀장님이 선배의 모든 말과 행동, 메일 하나 하나에 간섭을 하며 따로 혼을 내고 있었고 선배 또한 나처럼 매일 무너지고 있었다.


기존 팀장님의 그늘에서 벗어나서야 선배는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본 듯했다. 1년간 자존감은 무너졌지만 오기인지 자존심인지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갈며 더 열심히했고, 팀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남들보다 시간 관리에 더 열중하고 내가 못하는 것보다는 잘 하는 것에 집중해서 그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새로운 팀장님은 다행히 나의 그 장점을 좋게 봐주셨고 선배와 나의 사이도 자연스럽게 풀려갔다. 사실 선배와 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으려하고 잘하는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나는 선배에게 나의 답답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가슴 속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선배는 나에게 처음 1년간은 본인도 선배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했고, 본인도 리더로서 각 부서에서 요구하는것이 많아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어서 나를 케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스타일인지 무엇을 잘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고, 1년 이후에는 내가 본인의 기대 이상을 해내는 것을 보고 대견하다며 이제 본인이 없이도 리더로서 프로젝트를 운영할 수 있겠다고 안심했다.


이후에 나는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선배가 여러 곳에 나를 추천해주고 자신의 일처럼 발벗고 나서준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회사 내외로 크고 작은 고민들을 서로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선배는 하나뿐인 나의 팬클럽 회장이 되었다. 선배의 와이프까지도 내 팬이 되면서 몇년 후에 이런 사업을 할 예정인데 내가 꼭 회사의 살림(인사팀이나 경영팀)을 이끌어줬음 한다는 부탁을 했다.


나는 보통 한 번 아니다 싶은 사람은 다시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데, 처음이었다. 이름에 담기조차 싫었던 사람이 나의 MVP까지 된다는 것은. 그리고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한 사람이 될 것 같다. 버티는 것 조차 눈물나게 힘들었지만 그걸 2년 정도 버텨내니 이제는 왠만한 일로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에 대한 실력과 주변의 인정은 덤으로 따라왔다.


선배는 나에게 나를 만난 것이 2021년에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좋은 일이라 말했는데, 나 또한 선배를 만날 수 있던 것은 내 회사 생활 7년을 통틀어 가장 운이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 이런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올해 이 선배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이런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고 매년 나의 MVP(Most Valuable Person)를 선정해 감사함을 전달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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