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한마디에 무너진 나, 다시 나를 세우는 시간
“형아는 가끔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동생에게 툭 던지듯 말한 첫째의 말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매일 함께 하던 글쓰기 시간, 그날의 주제는 “죽는 날을 고를 수 있다면 언제로 하고 싶어?”였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글을 쓰고 있었고, 그 말은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동생에게 흘러나왔다.
나는 속으로 엄청 놀랐지만 최대한 차분한 척, 아이를 옆에 앉히고 조용히 물었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어?”
아이의 대답은 더 충격적이었다.
“친구들이 내 말 안 듣고 자기 말만 할 때 내가 하찮아 보여요.
쉬운 문제를 틀렸을 때, 나는 쓰레기 같아요.”
이런 말을 듣고 침착할 수 있었던 그날의 나를 칭찬한다. 아이에게 너의 그런 마음을 엄마에게 표현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엉엉 울었다. 나는 그저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요즘 들어 집에 와서 이렇게 자주 표현하는 아이 때문에 나도 힘든 날이 많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 자리에서 아이가 기댈 수 있고 안아주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또 그것이 최고의 위로라는 걸 안다. 내가 일하느라 바빴다면 아이는 그때 그때 감정을 풀 곳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의 낮은 자존감이 늘 걱정되긴 했지만, 설마 ‘그 정도’ 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바로 다음 날, 예전에 친구가 좋았다고 말했던 정신건강복지센터가 떠올라 시에서 운영하는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아동청소년정신건강센터에 전화를 돌렸다.
검사 예약을 잡고, 담임선생님께도 학교에서는 어떤지 여쭈어보기 위해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은 아이의 이런 모습을 전혀 모르고 계셨다.
교실에 더 심각한 아이가 있어 놓치셨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앞으로 아이에게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잘 지켜보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예민하니 혹시 검사나 상담받는 것이 내가 정말 문제가 있나 생각이 들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염려해 주셨다. 그때는 그 말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남편과,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본 후 검사는 받아보기로 했다. 아이를 위해 하나의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여러 의견을 듣고 또 내가 혼자 생각하며 결정을 내려야 후회를 하지 않는다.
검사 전날, 아이에겐 “엄마랑 데이트 가자”고 말하고 데리고 나갔다.
버스 안에서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엄마가 방법을 모르겠어서 전문가를 만나러 간다”라고 말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살을 언급한 적이 있어 ‘자살 관련 설문지’와 ‘심층 사정평가’를 했는데,
솔직히 초등학교 3학년에게는 좀 과한 문항 같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먼저 아이와 1:1로 이야기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아이는 울었던 흔적을 보여서 물어보니 그래도 말해서 “속이 시원하다”라고 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래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구나 말이다.
선생님께서 말하셨다.
아이는 2학년 때부터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으며, 담임 선생님의 “이 문제는 쉬운데 왜 틀렸지?”라는 말이
내가 바보인가 여기게 했다고 한다.
성적에 민감하고 잘하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점점 자존감이 무너져간 것이었다.
“지금은 말로 표현하지만, 더 크면 정말 실행할 수 있어요.”
이 말에 온몸이 떨렸다.
“왜 엄마한테 말 안 했어?” 물었더니
“엄마가 힘들어질까 봐요.”라고 했다고 하셨다.
아이는 혼자 힘들면서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를 전심으로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이 아이의 아픔을 보지 못했던 것 같아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이의 팔을 꼬집고 머리를 때리던 습관도 ‘자해’의 일종이라는 말을 듣고는 더 아찔했다.
검사 결과는 아주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미술치료와 정기적인 심리치료를 권유받았다.
그리고 근처 정신과 목록도 함께 주셨다.
‘정신과’라는 단어가 그렇게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예전에 슬기로운 초등생활 이은경 선생님의 유튜브에서 아이의 우울증 치료 경험을 공유한 영상을 보고 ‘굳이 저런 걸 올리나’ 싶었는데, 그날 밤, 그 영상이 생각났다.
전문가 선생님의 아들도 그랬는데 별일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며칠을 생각했다.
나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내 불안과 조바심이 아이에게 전해졌던 건 아닐까.
공부든 생활이든 아이가 ‘기본은 돼야 한다’는 내 기대가 이 아이에겐 무거운 압박이었을 수도 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빌린, 가수 이적의 어머님이 쓴 책을 읽다가 또 반성했다.
아이의 시험 스트레스를 해결하겠다며 학원을 더 보내는 것이 진짜 이 아이를 위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이 아이의 마음을 먼저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 아닐까?
그래서 결정했다.
치료는 치료대로 받되, 매주 한 번 ‘아빠와 첫째의 데이트 시간’을 만들기로.
마음의 단단함과 안정은 아빠와의 관계에서도 배울 수 있으리라 믿으며.
너는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야.
죽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도, 글쓰기를 통해 표현해 줘서 우리가 너를 도울 수 있었던 것도 정말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야.
엄마는 이제 너를 키우는 동시에, 엄마 자신도 다시 키우기로 했어.
더 단단하고, 더 여유롭고, 무엇보다 너를 있는 그대로 믿고 지지해 주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
너는, 정말 잘 자라고 있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