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절도 없어도 나는 부자
발꼬랑이 꼬부라질 만큼 추운 날이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간 12월 어느 날 우리는 제주로 이주했다. 8년간 살았던 김포에서 떠나는 감정은 생각처럼 시원하지만은 않았다. 더 이상 남을 미련 하나 없이 원 없이 살아본 곳이라 생각했던 김포는 막상 떠나는 날이 되자 왠지 모를 미안함과 쓸쓸함이 나를 감쌌다.
내가 조금 더 이곳에서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으면 어땠을지, 괜히 사서 고생을 하는 건 아닐지, 나는 이곳에서 실패해서 도망가는 건 아닌지. 서둘러 떠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조금 더 노력해 보지 못했다는 후회 섞인 미련은 나를 다시 붙들고 흔들었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더 이상 아닌 것 같아서 이곳에 머무를 이유도 의미도 없어졌기에 삶을 제주로 옮기기로 해놓고선 막상 떠나는 날이 되자 가지 않기로 한 길에 대한 미련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내 모습은 못나도 아주 많이 못나 보였다.
마지막 짐을 빼고 고양이 세 마리를 데리고 집을 나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우리 가족과 고양이들이 없어진 이 공간은 그냥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이었다. 조용히 다음 주인을 기다릴 뿐이었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집은 내 존재조차 모르지 않았을까 하는 씁쓸한 마음이 밀려왔다. 다음 주인에게도 좋은 터가 되어주길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나는 제주로 내려왔다.
미련 같은 게 언제 있었냐는 듯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설렘이 몰려왔다. 3마리의 고양이들을 데리고 공항을 누비는 우리 가족에게 시선이 한 몸으로 쏟아졌고 고양이들은 응답이라도 하는 듯이 늑대처럼 울어제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개운함과 통쾌함이 밀려왔고 ‘김포야 안녕. 이 언닌 제주로 뜬다!’라며 창문 열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세 가족과 고양이 세 마리는 집도 절도 없고 남편 직업도 없이 지금 생각하면 소름 끼치도록 아무 계획 없이 그렇게 제주로 이주했다.
연세로 계약한 작은 주택에 도착하자 마치 내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어머, 잠깐만, 내 집이라니. 우리가 머물기로 정한 이곳이 내 집이 맞는데 내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뭐란 말인가. 내 소유의 집만이 내 집이라고 생각했던 육지에서의 버릇은 이렇게도 종종 튀어나온다. 연세든 전세든 자가든 난 우리의 작은 주택에 그 어떤 이사 때보다 짐 정리에 신경을 쓰고 집안의 작은 부분까지 손길을 미쳤다. 불과 2년 전 브랜드 아파트를 리모델링해서 들어갔을 때보다 마음은 편안했고 설렘으로 심장은 두근거렸다.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듬직하니 우리 집을 감싸며 나에게 호랑이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고 집 앞 들판에서 말님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다 보니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내 것 같았다. 저 말은 내 말, 저 산은 내산이라는 직인이 찍혀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고 느끼고 즐기는 감정만은 오롯이 내 것이기에 어찌 보면 부자도 이런 부자도 없지 않을까.
이래도 저래도 뭘 해도 부족해 보이던 몹쓸 부족병에 평생 사로잡혀 살았던 난 처음으로 스스로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또에 당첨된 것도 새로운 집을 산 것도 남편이 새로운 직장을 얻은 것도 아닌데 보는 방향에 따라 가장 최악의 상황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난 최상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약간 변태적인 느낌도 들지만 그때 난 모든 삶의 형식과 규칙에서 벗어난 듯한 자유로움을 잔뜩 느꼈던 것 같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이상 환경이 바뀐다 해도 삶의 변화는 없을 것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내 의지로 만으론 무언가 되지 않고 아무리 노력하려 해도 답답함만 밀려온다면 환경을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바뀔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제주를 택했지만 아마 제주가 아닌 그 어떤 곳이었다 해도 내가 있던 그곳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삶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고 믿는다.
생수 한 병은 그 생수가 어디에 놓여있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고 한다. 먼지 쌓인 구멍가게에 있는 천 원짜리 생수는 굶주린 아프리카 주민들에겐 생명보다 빛나는 가치일 것이고, 고급 호텔에 놓여있을 때면 한 병에 만 원씩 하는 에비앙처럼 고급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지금 아프리카도 고급 호텔에도 있진 않지만 내가 선택한 제주에서 제주 삼다수만큼 맑고 시원한 맛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맑고 청량한 아이유가 광고도 해서 그런 건지 물이 맞아서 피부가 좋아진 건지 혈색도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다.
여전히 간간이 걱정은 밀려온다. 연세로 계속 지내는 게 맞는 걸지, 남편의 연봉은 언제 오르는 건지, 아이 교육이 뒤처지는 건 아닐지 수많은 현실적인 고민은 내가 어디에 있든 함께 한다. 이 고민들은 강약은 다르겠지만 제주에 있든 서울에 있든 다른 어느 지역에 있든 삶이 지속되는 한 언제나 누구한테나 매달려 있는 고민들일 것이다. 이왕이면 가볍게 매달고 살고 싶다. 제주 삼다수 물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우선 오늘 여기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물맛이 참 끝내준다. 역시 아이유다. 아니, 역시 제주삼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