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찐따와 제주반장
찐따로 살아본 적은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튀는 아이는 아니었으나 적당히 귀여운(강조하고 싶다) 모범생으로 잘 지내왔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엔 술이란 걸 잘 마신다는 큰 장점을 깨닫게 되면서 술잔을 부딪히며 짠짠짠 즐겨대느라 웬만한 일은 술 한잔과 함께 털어버리곤 했다. 기쁨 주고 사랑받는 사회인까진 아니어도 적당히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아는 유머 있는 사회인 정도는 되는 편이었다.(고급레벨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너무 쉽게 본 것일까. 엄마가 된 이후로 어느 날 문득 모든 게 바뀌어있었다. 찐따가 돼버린 것이다. 추락하는 새에겐 날개가 없다더니 정말 깃털하나 없이 알통닭으로 추락해 버렸다.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났거나 누군가 나를 모함했거나 왕따를 시킨 것도 아니었다. 조금씩 서서히 한 명씩 엄마들이 나를 떠나갔다.
제주로 오기 전 육지에서의 내 생활은 그냥 ‘엄마’였다. 30대 중반의 엄마들은 평균이상의 학력과 중상위층의 경제력으로 가진 모든 걸 아이의 교육에 쏟는 분위기였다. 난 그들의 분위기를 따라가야 아이가 뒤처지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에 사로잡혀 열심히도 엄마들의 모임에 나가며 그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어느 엄마도 놓치지 않으려 했고 은근히 그들의 중심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야 내 아이에게 이득이 될 것 같았고 그렇게 신도시를 누비는 자랑스러운 돼지엄마(사교육에 대한 정보에 정통하여 다른 엄마들을 이끄는 엄마를 이르는 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돼지엄마가 되려 하면 할수록 그들의 교육관에 의문감이 생겨났다. 왜 이렇게까지 사교육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건지, 스스로가 하지 못한걸 아이를 통해 이루고 싶은 건 아닌지, 정말 아이를 위한 게 맞긴 맞는지 그들의 모임에도 의구심이 생겼고 어느 날부터는 점점 그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아 졌다.
내가 변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엄마 앞에서 ‘정말 아이를 위한 게 맞는 것이냐’라는 의중이 실린 질문을 했다가 난 그날 된통 말로 얻어맞았다. 언니는 믿는 게 있어서 그렇게 태연한 것이라며(난 믿는 거라곤.. 내 몸뚱이?) 그들은 한순간에 차가운 시선과 말투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들 모임에서 제외되며 찐따로 전략해 버렸다. 찐따는 처음 겪는 감정과 입장이었다. 한번 내가 찐따가 됐구나란 생각이 들자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찐따스럽게 느껴졌다. 아는 엄마한테 말 한마디를 건네도 찐따가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고 행동도 찐따스러워지는 것 같아 점차 엄마들을 피하고만 싶어졌다. 여자들의 세상은 한 번의 삐끗거림으로 세상 무서운 곳으로 변해버린다.
제주로 온 이후로 난 엄마들과는 만남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엄마들과의 만남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아주 징하게 내려버렸다. ‘엄마’로서가 아닌 그냥 ‘포비언니’로서 사람들을 만나고 관심사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 제주이주 후 1년의 시간 동안 나는 글쓰기와 관련된 만남만 이뤄가며 어느덧 모임의 반장역할까지 (믿음직스럽게) 해내고 있다. 나는 똑같은 나일뿐인데 육지에서 ‘엄마’로서의 난 추락한 찐따였고 제주에서의 ‘포비언니’로서의 난 모임의 똘똘한 반장이다. 단순히 환경이 바뀌어서 나란 사람의 가치가 바뀐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막상 찐따생활을 겪어보니 한번 나락에 빠진 찐따는 내 힘만으로 그 역할을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바꿀 수 있다면 환경도, 만나는 사람도 모두 다 바꿔버려야 무엇이됐든 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제주는 나에게 많은 걸 주고 있지만 내 가치관에 맞는 생활환경과 사람들까지 마련해 주고 있다. 어쩌면 많은 일들을 겪은 후 내 가치관이 바뀌면서 지금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온 제주이기 때문에 그 계기가 더 큰 것은 확실하다. 나를 찐따로 만들어준 엄마들이 걱정하던 아이의 교육도 제주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내가 글을 쓰는 모습을 아이가 보고 따라 하며 독서와 숙제를 스스로 하며 정말 몸뚱이만 믿고 있던 내 마음과 같이 내 몸뚱이를 보고 잘 따라오고 있다. 돼지엄마를 꿈꾸던 육지 찐따는 제주로 건너와 좋아하는 글쓰기에 빠져 작가를 꿈꾸는 제주반장이 되었다.
육지찐따 눈 쌓인 제주에서 글 쓰며 소리쳐본다.
“오겡끼데스까 제주반장데스 겡끼데스!!”
한라산이 쩌렁쩌렁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