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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bi미경 Oct 14. 2023

여자의 자존심을 때려치우다

고백, 여자가 하는 거 맞죠?


첫눈에 꽂았다.

그의 선택 따위는 상관없었다. 내가 꽂았기 때문에 난 그를 낚아야 했다.

(나를 겨냥한듯한) 심플한 옷차림, (더듬어보고 싶은) 얇은 팔다리, (내 손길을 바라는) 깔끔하게 정돈된 뒷머리, (나를 보는듯한) 선한 눈매, (애를 태우는) 선 긋는 말솜씨, 모든 게 나를 향해 있었다. 어디 숨었다가 이제 나타났을까 싶은 그에게 욕망에 불타던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는 대기업 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내가 고심 끝에 옮긴 광고대행사의 본부장이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그는 안정적인 회사를 관두고 힘든 광고대행사로 옮긴 이유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의 친절한 질문에 난 "빡세게 일해보고 싶어서요"라고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약간의 당황한 표정의 그가 오히려 난 귀엽게 느껴졌다.

디자인 팀장으로 입사한 난 정말 빡세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편했던 회사 때려치우고 이게 뭔 고생인가 싶을 때마다 회의할 때마다 마주치는 그를 보며 ‘저놈을 만나려고 내가 여기를 왔구나’라며 혼자 스산한 미소를 짓곤 했다.


대기업에서 갑의 자리에서 일을 해왔던 난 모든 기획팀들의 업무를 받아서 하는 을의 자리가 쉽진 않았다. 어느 예의 없던 과장과의 신경전 후 열이 받았던 난 그 과장의 윗사람이었던 그에게 사내 메신저를 남겼다.

“J 과장이 저에게 어쩌고 저쩌고 해서 제가 지금 마음이 무척이나 상했는데 본부장님이 대신해서 술이나 한잔 사시죠?”

그는 한 달 전에 쓸개 떼는 수술을 한 상태라 (그렇다 쓸개 없는 놈이다)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했고 그럼 난 나 혼자 마셔도 되니 내가 말한 장소로 나오시기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난 큰 계획을 품고 내 오피스텔 바로 앞 술집으로 그를 불렀다.

술도 잘 못 마시는 그를 1차, 2차까지 끌고 다니다가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본부장 뉨~ 제 집이 요기 바로 코앞인데 저희 집에서 3차 하시는 게 어뙈요~?”

당황한 표정의 그는 극구 거절했지만 어지러운척하며 그에게 난 들러붙었고 그는 그렇게 결국 내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집안으로 들어온 먹잇감.. 아니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나는 흥얼거리며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어찌나 설레던지 준비된 깜찍한 잠옷도 입고 머리를 털며 욕실 밖으로 나온 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있어야 할 그가 그 어디에도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놈이 튄 거다. 어찌나 조용히 신발을 들고 튄 건지 나가는 문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었다. 그때 우리 집에 있던 강아지만 신나게 나를 보며 짖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놓쳐버린 난 맥주를 들이켜며 울분에 휩싸였고 그는 정신없이 도망을 친 건지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다음날 멀쩡히 출근해 있는 그를 향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봤으나 그는 헛기침만 한 채 일에만 몰두하였고 놓쳐버린 먹잇감에 나는 아쉬움 가득한 침만 흘려야 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금요일 저녁 사내 메신저가 울렸다.

“유팀, 영화 볼래요?”

아니 이자슥이 이제 와서 영화를 보자고 하네. 그럼 당연히 봐야지.

“네 좋아요”

“그럼 유팀이 예매해요.”

아니 이자슥이 영화까지 나한테 예매하라고 하네. 그럼 당연히 내가 해야지.

“몇 시가 좋을까용?”

그렇게 그와 첫 영화를 보고 맥주를 한잔했더니 비가 쏟아져내렸다.

“비도 오는데 근처 본부장님 댁에 가서 한잔할까용?”

지독한 들이대기에 지쳤는지 그는 그러자고 했고 그날 밤  큰일을 벌여야겠다고 결심한 난 그를 향해 돌진했고 드디어 그를 덮쳐버렸다. 그가 그날 밤 눈물을 흘렸는지 어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날 이후부터 우리의 연애와 동거는 시작되었다.


결혼 15년 차인 지금 그에게 가끔 묻는다.

“오빠 그때 왜 도망쳤었어?”

“어.. 아하하하하.. 하하 하하.. 하하..”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줄행랑이라 그는 지금도 이 질문만 나오면 그때처럼 도망을 다닌다.

운명은 기다리는 자에게 스스로 다가오진 않는다.

부끄러움에 마냥 그가 나에게 다가오길 기다렸다면 우린 지금 부부로 살고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난 지금도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너무 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그를 통해서 매번 확인받는다.

내 거침없는 고백으로 난 그를 얻었고 그는 나를 얻었다.


‘사랑에 고픈 자가 할 일은

다만

저 골목 어귀를 도는 일.


거기

따뜻한 체온을 지닌

사람이 있다.


눈을 맞추라.

이야기가 시작된다.

머물라.

그가 당신 안으로 들어온다.

-내 눈앞의 한 사람 오소희-'



고백, 여자가 하는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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