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의 ‘식’을 내려놓다
30대 초반 이직한 회사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첫눈에 내 남자였기에 술을 많이 마셨다는 핑계로 그의 집에 쳐들어간 날, 난 불타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그를 덮쳐버렸다. 그는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내 남자로 묶여버렸고 사내커플이 된 우리의 동거는 5년간 지속되었다. 양가 부모님도 다 아는 만남이었고 기간이 길어질수록 주변에서 점차 결혼은 언제 하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남편과 동거하는 기간 동안 주변에 많은 지인들이 결혼식을 올렸다. 다들 너무 아름다웠기에 어떤 결혼식이든 신부가 등장하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나 역시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심은하가 입었던 어깨에 뽕이 가득한 공주 드레스를 입는 게 꿈이었고 그걸 입으면 심은하 못지않게 아름다울 것이라 상상해 왔다. (상상이다) 그런데 그 드레스를 막상 알아보니 하루 렌트 값만 몇 백만 원이었고 내가 꿈꿨던 하우스 웨딩은 예식장 대여비만 해도 눈알이 튀어나오는 금액이었다. 웨딩 사진도 몇 군데 돌아다녀 보니 신랑신부들 포즈가 다 너무 똑같아서 같은 몸에 얼굴만 다른 합성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결혼식의 뒷면엔 당사자들의 노력과 고생들이 엄청난 걸 알게 됐다. 다툼 없이 잘 준비하는 경우도 물론 있으나 대부분의 예비부부들이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어떤 한 친구는 결혼식 후 할부비용이 나갈 때마다 결혼식을 매달 치르는 기분이라며 한숨을 쉰 적도 있었다.
우린 점차 결혼‘식’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이만큼의 돈과 에너지를 투자를 했을 때 우리가 얻는 건 무엇이고 결혼식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하고 논의했다. 남들이 하기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일생에 한 번뿐인 날이니까, 여러 이유들이 나왔으나 진짜 우리 두 사람이 결혼식을 원하는지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린 이미 5년의 동거 기간이 있었고 충분히 서로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건 변치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혼식이란 빅 이벤트를 둘 다 원하지 않았다. 우린 결국 긴 고민 끝에 결혼식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혼식에 투자할 예산은 우리의 첫 전셋집 보증금에 보태기로 했고 긴 시간 양가 부모님을 설득한 후 혼인신고를 했다.
우리만 좋다고 이렇게 정리해 버리기엔 주변인들의 축하해 주시는 마음을 알았기에 다른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어느 좋은 금요일 저녁 맛깔스러운 (소) 고깃집을 빌려 회사 동료와 지인들과 함께 전체 회식을 했다. 회식 내내 우리는 두 손을 잡고 인사를 올리며 술과 고기를 함께 즐기며 먹었고 회사 대표님의 넓은 아량으로 회식비를 축의금으로 대체했으며 그 다음날 바로 일상생활을 지속했다.
우리의 결혼식 사진은 그날의 전체 회식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사진 속 많은 지인들은 모두 정장이 아닌 편한 일상의 옷을 입고 있었고 뷔페나 스테이크가 아닌 불 판에 자글자글 구워 먹는 소고기를 크게 한입씩 싸 먹으며 한 분 한 분 우리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인사를 해 주셨다. 발갛게 달아오른 즐거운 얼굴이 가득한 전체 회식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 감사하다. 모두들 결혼식 대신 회식을 선택한 우리만의 방식을 존중하고 축하해 주셨다. 주변 분들의 이해와 감사한 마음은 오랜 기간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우리의 부부의 모습으로 마음을 갚아 나가고 있다.
그날은 내 결혼식 로망이 이루어진 날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의 로망이 이루어진 날이 되어주었다.
100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YES, I DO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나중에 내 아이가 커서 엄마인 나에게 왜 결혼식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주고 싶다.
“엄마는 엄마만의 방식으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었어.
그날의 엄마는 그 어떤 신부보다도 행복했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