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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bi미경 Jun 03. 2024

아빠는 병원에서도 블랙리스트


아빠는 대장암 2차 수술을 하고 입원 중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아마도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을 것이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짜증을 내고 있다. 배가 아파서, 배가 고파서, 간호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옆에 입원한 사람이 시끄러워서, 내가 전화를 한통 놓쳐서, 엄마가 면회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와있지 않아서, 잠이 안 와서, 추워서, 더워서, 심심해서, 그냥 화가 나서 등등 아주 세상 모든 일에 화를 내며 행패를 부리며 하루에 10통이 넘는 전화를 매일 해대고 있다. 큰 수술을 하고서도 저렇게 모든 일에 격노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면 어릴 때 밥상만 뒤엎었던 건 굉장한 인내심이었다는 게 새삼 느껴진다.      


아빠는 수술 전만 해도 많은 부분 바뀌어 있었다. 혼자 남을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했고 내게 미안했던 일들을 후회했으며 언니에 대한 마음도 많이 내려놓았었다. 난 그런 아빠를 보며 마음이 아팠고 아빠를 위해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지금 내 눈물은 쏙 들어갔다. 수술 후 쌩쌩하게 돌아온 아빠는 예전보다 성격이 더 더러워진 채 혼자 발광을 하고 있다. 자기가 왜 아파야 하냐고 억울해하고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린 채 주변 사람들을 들들들 볶고 또 볶는다. 이렇게 계속 볶이다간 엄마와 내가 열이 받아 혈압으로 쓰러질 판이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고 하던데 죽을 고비를 넘기면 바뀌었던 사람은 더 악독해져서 다시 돌아오는 것 같다. 바뀌었던 그 순간까지 억울해하며 죽기 전 베풀었던 모든 마음을 모조리 다 수거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는데 아빠를 보면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눈으로 매번 확인하게 된다.   

   

아빠는 어젯밤 결국 옆에 입원한 사람과 대판 싸웠다. 수술 전 후로 금식에 지금은 풀죽같은 것만 먹고 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당신 때문에 시끄러워서 더 아파죽겠다며 소리소리를 질러댔고 그렇게 아빠는 병실을 옮기게 됐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아빠의 고함소리는 어린 시절 혼자 분에 못 이겨 난리를 쳐대던 아빠가 그대로 떠올랐고 내가 지금 제주도에 있는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하늘에 감사하고 싶었다. 아마도 난 서울에 있었으면 그 난리법석인 싸움 한복판에 서서 중재를 하느라 오밤에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을 것이다. 아빠의 온갖 화를 다 받아내고 있는 엄마가 너무 걱정된다. 한평생 아빠에게 받아왔던 스트레스가 쌓여 10여 년 전 경미한 뇌출혈까지 겪었던 엄마는 아빠의 지랄 맞은 암투병으로 인해 지금 최악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투병 중인 모리교수는 아들들에게 말한다. 너희 생활을 멈추지 말라고. 안 그러면 이 병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 우리 세 사람 모두를 집어삼켜 버릴 것이라고. 

반면 아빠는 멈추지 말라기는커녕 모든 생활을 멈추고 자신만을 바라보라고 외치고 있다. 본성이란 대단하다. 죽음이 코앞까지 와있든 말든 죽음에게까지도 아파죽겠으니 꺼지라고 소리 지를 것 같은 기세다. 저승사자도 오늘 똥 밟은 날 같다며 운세풀이를 할지도 모르겠다.      


아빠를 보면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빠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내게 자신과는 절대 닮지 않도록 가르침을 준다. 죽음이 앞에 오면 돈도 명예도 지위도 그 어떤 것도 필요 없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 인해 내 죽음으로 인해 충분히 슬퍼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로 인해 억지로 시간을 내고 나 혼자 감당해야 할 고통까지 함께 나누길 바라고 싶지 않다. 어떻게 죽을지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있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 수는 없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죽음을 맞고 싶진 않다. 어쩌면 아빠가 주는 마지막 깨달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 이상 아빠에게 깨달음을 얻게 되질 않길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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