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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부하는 워킹맘 May 12. 2021

그림 그리는 여인

늦깎이 미술 공부

“참 그리기 힘드네. 아무리 그려도 눈 같지가 않아.”

주방 식탁 위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오후 내내 그림과 씨름하는 엄마가 하는 혼잣말이다.


엄마는 그 시절 많은 여자들이 그랬듯이 오빠들 틈에서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짧은 가방끈은 그녀의 평생 콤플렉스였고,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배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름 좋은 시절에 태어나서 남자와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누리며 자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공부에 대한 한(限)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배우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느 날 우연히 방문했던 부동산에서 벽에 걸린 유화를 보게 되었다. 느낌이 꼭 소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 같았다.

“직접 그리셨나봐요. 정말 잘 그리시네요.”

“학원 2년 정도 다니면 누구나 그려요.”


처음 만난 손님의 칭찬에 웃으면서 대답해 주셨다. 옳거니.. 이거다 싶었다. 그 날 이후 엄마에게 미술 공부를 할 기회를 드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책만 보면 눈이 아프고 졸리다는 엄마에게 공부가 아닌 미술의 세계는 왠지 어울렸다. 마음 속 응어리도 그림 속에서 풀리지 않을까?


2021년 새해 계획을 세우기 위해 만트라 양식을 작성하면서도 “엄마 미술 교육”을 살며시 넣었다. 쓰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내 목표는 아니지만 썼으니 이뤄지리라 믿었다. 생각날 때마다 살며시 째려보았다. 이후 엄마에게 넌지시 미술을 권했다.


“엄마, 미술 배워 보는 거 어때요?"


당연히 한 번에 오케이 할리 없었다. 잊을 만하면 이야기를 꺼냈다. 그 와중에 뜻밖에 공헌을 한 사람이 있는데 내 딸이다.


“할머니 전에 나랑 그림 그렸는데 엄청 잘 그렸어. 할머니 미술에 재능이 있어.”


쬐끄만게 뭘 안다고 할머니에게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꽃이 피었다. 60이 넘도록 모르고 살던 재능을 손녀가 알아봤던 것인가? 과연 손녀의 칭찬과 응원은 강력한 힘이 있었다. 엄마는 드디어 미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수업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보니 너무 잘해서 기가 죽는 듯하더니 두 달 째 되니 제법 재미를 붙이신 듯하다. 시간이 나면 숙제를 한다면서 애를 쓰신다. 사과를 그리는데 꼭 감자 같고, 각 티슈 상자를 그리는데 명암 조절이 쉽지 않아 지우개가 괴롭다. 평생 해 본적 없는 스케치가 어디 한 번에 뚝딱 되겠는가? 이번 주는 사람 눈을 따라서 그러야 하는데 그냥 봐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지난 몇 주간 그린 걸 보니 느리지만 조금씩 발전하는 게 보인다. 스케치가 끝난 숲에 물감을 칠했는데 제법 그럴 듯하다. 따라할 그림을 선생님이 잃어버리셔서 엄마 마음 가는 대로 했다는데 밝은 색감이 보는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한다.


“하다 보면 뭐 라도 되겠지.”


지난 주에는 숙제하면서 힘들어 하시더니 이제 스스로 격려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다. 시작은 힘들지만 일단 시작만 하면 누구 보다 열심히 하시는 모습은 항상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 엄마에 비하면 너무 편한 환경에서 공부해 왔으니까 말이다.


미술학원에 10살 많은 선배 할머니가 계신데, 딸들이 보내줘서 공부하는 거라며 작품을 선물하려고 열심히 그리신다고 한다. 언젠가 내 방 한쪽 벽면에도 엄마가 그린 그림이 걸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날이 올 때까지 물심양면 지원을 해봐야지..


‘돈 열심히 벌 테니 엄마 포기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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