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 도성길라잡이
2006년에 일본 출장 길에 휴가를 덧붙여 도쿄와 인근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다. 여행 중 도쿄에 있는 우에노 공원에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게 됐다. 이 할아버지는 하노버 할아버지처럼 근사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일본인 치고 영어를 굉장히 잘 하는 분이었다. 관광객들에게 자원봉사로 우에노 공원을 안내하는 그분은 70세은 족히 넘어 보였다. 유창한 영어로 관광객들에게 신나게 공원을 소개 해주는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아~! 선진국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누며 이런 자원 봉사 활동을 즐기며 사는구나. 역시 선진국은 다르구나.’ 생각했다.
2011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출장 온 미국인 동료의 주말 관광을 위해 창덕궁에 데리고 갔었다. 창덕궁 입구 한편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젊은 사람들 앞에 외국인이 몇 명 모여있길래 궁금해서 가보았다. 그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 과학, 전통을 알리는 영어로 쓰인 책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 취지는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신을 세계로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원하는 분야의 책을 한 권 선물로 주면서 이렇게 부탁을 했다. “이 책을 잘 읽고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도서관에 기증 해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알 수 있도록 말이에요” 라고 말이다. 그 활동이 멋지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속으로 결심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의미 있는 활동을 시작 해야겠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우연히 그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우연히 트위터에서 한양도성을 안내하는 자원활동가인 도성길라잡이 5기 모집 공고를 보게 된 것이다. ‘아! 그래~! 이거야~!’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즉시 지원서를 냈다. 운영진 측에서 말하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교육생이 되어 10개월의 빡빡한 교육 및 수습 과정을 마치고 도성길라잡이가 되었다. 사실 나는 지원서를 내기 전까지도 한양도성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였다. 1394년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된 뒤부터 18.6km 길이로 축조됐고 지금까지도 도심지 일부를 제외한 많은 곳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서울시 사적 제10호의 문화재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도성길라잡이는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을 계기로 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시민 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작된 자원활동이다. 서울 한양도성의 시민 안내를 통해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고 ‘살기 좋은 서울’의 미래를 함께 만들자는 취지이다. 도성길라잡이의 연령층은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하지만 30~50대가 주를 이룬다. 직업도 다양한데 대부분은 나와 같은 일반 직장인이고 교사, 학생, 주부 등으로 구성되어 현재 약 120명 정도 활동하고 있다. 총 네 구간으로 나누어 활동하며 나는 숭례문에서 시작해서 정동길을 지나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마무리 되는 인왕구간을 안내한다. 총 4시간이 소요되는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코스이다.
한양도성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서울에 살면서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단체는 일년에 한번 한양도성 네 개 구간을 한번에 완주하는 순성놀이 행사를 진행한다. 약 10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이다. 보통 시민들만 약 400명 정도가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인데 2018년 전에는 외국인들 그룹도 따로 모아서 영어 안내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처음이라 걱정도 많았지만 동료 활동가들과 준비도 많이 했고 참여한 외국인들의 반응이 모두 좋아서 큰 성취감과 보람을 느낀 적이 있다. 직장 내에서도 출장 온 외국인들에게 도성을 안내해 줄 수 있냐는 요청도 꽤 많이 받아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안내 해주기도 했다. 안내를 부탁한 동료들도 기가 살고 고마워 한다. 그들에게 새로운 서울을 보여줄 수 있어서 나도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
이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잘 알지 못했던 역사 공부를 하고, 그것을 나누면서, 배워서 남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답답하기만 하던 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다. 처음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개미떼처럼 수많은 인간들이 앞만 보고 서로 먼저 가겠다며 밀치며 몰려다니는 출퇴근길 지하철을 경험하게 되니 이 도시가 너무 답답하고 삶이 우울해 졌다. 그랬던 내가 도성길라잡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우울했던 마음도 점차 사라지게 됐다.
우연히 시작한 자원활동이 내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돈은 안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활동이 사회에 작은 도움이 된다는 뿌듯함을 갖게 되었다. 한 직장 동료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우리 회사 직원 중에서 최고로 high quality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나는 그건 잘 모르겠고, 남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사는 것은 맞는 것 같다고 답했다. 지금은 코로나로 모든 활동이 멈춘 상태이고 내게 주어진 여러 과업에 충실하다 보니 활동에 대한 열정의 불씨도 많이 꺼지긴 했지만 참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