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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l 11. 2024

아줌마의 히치하이킹

버스가 없다뇨

“What? No bus?”

 뭐어? 버스가 없어?



숙소 호스트의 말에 멘붕이 왔다. 아이슬란드 북부 후사빅에서의 마지막 저녁 날. 나는 다음 날 버스를 타고 동부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알아, 일요일에는 전국에 버스가 없다는 거. 그것도 이미 충분히 놀라워. 그런데 내일은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잖아. 구글맵에서 체크했을 때 분명 버스가 있었다고. 자 봐봐…



구글 맵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분명 버스가 있다. 다만… 다시 보니 출발 날짜가 돌아오는 월요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버스가 없는 것이다. 바보 바보 바보… 아이슬란드에 일요일에는 버스가 없다고 들었을 때 혹은 토요일도 그렇진 않은지 꼼꼼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해?

주말이 지날 때까지 그 마을에 머물 수는 없었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인 동부 끝까지 가려면 이제 서둘러야 했다. 앞으로 남은 여행 날짜는 일주일 남짓. 그날 밤, 나는 숙소 앞의 가게에서 한 장에 오천 원 하는 도화지를 사서 독립선언문을 쓰는 비장한 마음으로 글씨를 썼다. 마침내 때가 되었구나. 히치하이킹.

 

"Egilsstadir까지 제발 데러다주세요"






최종 목적지인 세이디스피외르뒤르(Seyðisfjörður)까지 가는 버스는 어차피 주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근처인 에이일스타디르(Egilsstadir)까지는 버스를 타고, 거기에서부터 세이디스피외르뒤르까지는 가까우니까 히치하이킹을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출발부터 히치하이킹을 하게 된 것이다. 차로 3시간 거리를. 



가슴이 둥둥거렸다.



히치하이킹의 천국이라잖아. 안전한 나라잖아.  

어차피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으면 시도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불길한 생각도 쓰윽 올라왔다.



비라도 오면 어떻게 하지?

더 안 세워 줄 텐데? 글씨도 안 보이고.

정말 아무도 안 세워주면 어떻게 하지?



등에 매고 서 있기도 힘든 배낭을 쳐다보았다. 혹시 걸어서 간다면…?

220 킬로미터. 이틀 소요. 끙……






“We can drive you to the gas station.”

우리가 주유소까지 널 데려다줄 수 있어.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던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지난 3일 동안 정든 독일인 부부. 자신들은 서쪽으로, 나는 동쪽으로. 가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 데려다줄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그들이었다.  



“Oh, really?!”

그런데 주유소까지 가는 게 좋은 건가?



그들의 말인즉슨, 차가 잘 다니지 않는 이 동네보다 40분 거리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동서로 갈리는 교차로인 데다가 주유소가 있어서 오가는 차들이 많을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천사 부부 같으니라고!




You are a great person with a lot of strength and I'd love to meet you someday again, wherever that may be...

If you ever come visit Germany, let us know. Maybe on the next stopover to Iceland?

Hopefully, you can take the spirit of Icelandic way of life back to Korea and remember the quietness to keep you up in a busy daily life.

너는 강인한 에너지를 가진 멋진 사람이야. 언제가 우리가 다시 만나길 바라, 어디서든지 말이야.

독일에 오게 되면 알려줘. 혹시 다음에 아이슬란드에 들를 때?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삶의 방식을 한국에 가져가. 바쁜 삶 속에서도 그 고요함을 기억하면서 힘내.



카롤라의 말에 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사춘기 큰 아들과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 짧은 영어로 횡설수설할 때 조용히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고, 맛은 별로인데 먹어보겠냐며 음식을 권하던 다정한 부부.



“And this. We can buy them again.”

그리고 이거. 우린 또 사면되니까.  



휴게소에서 헤어지기 직전, 카롤라의 남편 요헨은 각종 초콜릿과 에너지바가 한 무더기 들어있는 봉지를 나에게 건넸다. 혹시 히치하이킹이 잘 안 되면 먹으라고 주는 건가(잠시 후 현실화).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진짜 혼자다.



주섬주섬 휴게소 맞은편 도로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내는 건 아니지만 큼큼 목청을 가다듬고, 종이를 들었다. 낯설고 어색하고 멋쩍고 떨리고 약간 재미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차들아 휙휙 지나갔다. 관광버스 안의 사람들이 창문에 붙어 그 몇 초 간 나를 구경했다.



“Have fun!”

즐거운 시간 보내! (힘내!)



사이클링 무리들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나, 턱짓이나 멘트를 날리고는 사라졌다. 지나가는 차량들은 또 어떤지. 운전자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그 순간에도 내 종이를 유심히 보고, 표정과 몸짓으로 네가 가는 방향으로 가지 않아, 어쩌나, 미안해 죽겠네 라는 제스처를 열심히 보내주었다. 가슴속이 따뜻하게 몽골몽골 해 지던 순간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지나가는 차가 너무 없었다. 아이슬란드는 링로드라고 해서 섬의 테두리를 따라 길이 이어져있고, 메인 도로는 그거 하나이기 때문에 육지의 중앙을 가로지르지 않는 이상 그 길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차가, 사람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나는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점퍼를 꺼내 후드를 뒤집어써서 뜨거워진 머리를 가렸다. 요헨이 준 에너지바는 세 개째 먹었다.



한 시간 반 경과.


나는 배낭 위에 앉아서 쉬다가 저 멀리 차가 보이면 슬며시 일어나 종이를 들었다. 태워주겠다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나, 싶은 초반의 우려는 사라진 지 오래. 제발 태워만 주면. 같은 방향으로 가다가 내려만 준다면. 제발.



간절함과 걱정, 쪼그라드는 자신감,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현타, 마치 아이슬란드에 가면 누구나 하는 것처럼 호언장담하던 출발 전의 내 모습…





그때 갑자기 왜 그랬나 모르겠다.

셀린 디온(Celine Dion)을 좋아하지 않는다.

팝송을 즐겨 듣지도 않는다.

그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도대체 언제 적 셀린 디온이야???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멜론에서 셀린 디온의 ‘all by myself’를 찾아서 볼륨을 최대치로 올렸다. 전주가 흐르자 소름이 쫙 올랐다. 나는 그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를 몰라서 클라이맥스인 ‘all by myself’ 부분에서만 소리를 내질렀다.



When I was young, I never needed anyone

내가 젊었을 때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어요


And making love was just for fun

그저 재미를 위한 사랑을 했었지요


Those days are gone

하지만 그날들은 이제 다 지나갔네요


Living alone, I think of all the friends I’ve known

혼자 살면서 옛 친구들을 생각해 봤어요


But when I dial the telephone, nobody’s home

하지만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때면 아무도 집에 없더군요


All by myself. Don’t wanna be.

혼자. 이제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All by myself~~~ anymore.

혼자. 더 이상은요.


All by myself, don’t wanna be.

혼자. 이제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All by myself, anymore.

혼자. 더 이상은요.



나는 울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펑펑 우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아이슬란드의 하이웨이에서 종이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건지 악을 지르는 건지 싶은 그 모습이, 그 순간이 외로웠다. 동시에 뭔지 모를 강력한 위로가, 에너지가 내 안에 차올랐다. 나는 혼자라고, 그러나 동시에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내 음성은 간절하고 또 간절했다. 조금 전 헤어진 카롤라와 요헨이 떠올랐다.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한국에 있는 친구들, 남편과 내 아이들, 그리고 다시 거기 그렇게 서 있는 나 자신을 상기했다. 며칠 전 후사빅(Husavik)의 어느 산에서 전미도의 ‘butterfly’를 미친년처럼 부르며 울고 웃었던 것처럼 이제 나는 셀린 디온의 ‘all by myself’를 멋대로 해석하며 회오리바람처럼 타올랐다.




정면의 차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 진짜?


속도를 줄이는 차를 보며 노래를 뚝 끊었다.



"여기 말고, 저 앞의 좌회전 길에 서 있어. 거기가 네가 가는 동쪽으로 가는 방향이야."



왓?!!!
 


어쩐지!!! 운전자들이 자꾸 어떤 방향을 가리키더라. 그러니까 나보고 거기 가서 서 있으라는 말이었네! 바보 바보 바보!!!



내 머릿속에서 독무대가 한창이던 셀린 디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사라졌다.





다시 두 개의 배낭을 앞뒤로 메고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종이를 들었다.


Five.


Four.


Three.


Two.


One.



몇 초 만에 작은 용달차 한 대가 내 앞을 지나 차를 세웠다.  


나는 주섬주섬 차에 다가갔다. 그가 조수석의 창문을 내렸다.


“Do you…?”

저기 혹시...?


“Yes! I’m going to the town!”

그래요! 내가 바로 그 마을로 가요!



나는 아이돌 가수를 만난 10대 소녀처럼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 왼쪽부터 독일인 요헨, 숙소 호스트, 나, 독일인 카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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