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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l 16. 2024

영화 속 공포, 현실 속 반전

똑바로 보라고

테이큰(Taken, 2008)이라는 영화가 있다. 인신매매 당한 10대 딸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복수극이고 리암 니슨이 주인공인 영화인데…… 



아이슬란드 동부 세이디스피외르뒤르까지 가기 위해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나선 날. 육중한 배낭을 앞뒤로 메고 이제 막 찻길로 들어서 종이를 드는데 눈앞에 기아의 모닝 정도 되는 자그마한 차가 섰다. 



“Hey.”

운전석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장발의 백인 남자. 창 밖으로 내민 팔을 휘감은 타투. 그리고 그런 남자가 하나, 둘...... 넷?! 



“We’re in the same direction.” 

우리가 너랑 같은 방향으로 가. 



“…oh, wow.” 
 아, 그러니까 지금 나를 태워주겠다는 거구나…? 애매한 감탄사와 달리 내 발은 당최 움직이질 않았다. 그 순간, 본 지 10년도 훌쩍 넘은 그 영화가 떠올랐다. 테이큰. 



이 차는 타면 안 돼. 



태워줄 사람을 골라서 탈 수 없다는 것이 히치하이킹의 크나큰 단점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도 없기에 겉모습만 봐서 판단할 수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의 외모만으로도 이미 식은땀이 난다.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줄행랑을 친다거나… 물론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조수석에 타고 있던 장신의 남자가 내리더니 이미 남자 둘로 꽉 찬 뒷좌석에 낑겨 타며 나에게 조수석에 타라고 손짓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더듬더듬 말을 내놨다. 


“You don’t have enough seats. Thank you but I guess it’s okay for me.”

고맙긴 한데 자리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러니까 내 말은, 제발 그냥 좀 가줄래. 



그러나 그는 내 애매한 말을 겸손함의 표현으로 인식했던지 손사래를 쳤다. 

“I can hug my friends.” 

친구들 껴안고 있으면 돼. 



내 짐이 뒷 트렁크에 실어졌다.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맸고 차가 출발했다. 창문은 굳건히 닫혀있었다. 이 안에서 소리를 질러도 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차피 창문을 열었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나는 이제 신께 기도드릴 수밖에 없다. 






차 안의 어색한 공기를 깨고자, 아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 뭔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Poland.” 

아, 폴란드. 그래 폴란드 알지. 영화에서 봤어. 마피아, 마약, 인신매매…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의 동유럽 남자들 말이야.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옆에서 운전 중인 그의 목소리 톤은 낮고 어두웠다. 대체적으로 말이 없었다. 차에 흐르는 저음의 느리고 반복적인 일렉 기타음은 안개 낀 동유럽의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처럼 음산했다. 곧 차 안에도 안개가 찰 것 같았다. 놀라운 풍경이 창 밖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나는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열심히 창 밖을 구경하는 척했다. 폴란드, 폴란드…… 머릿속에서는 ‘폴란드’를 수없이 되뇌고 있었고, 슬쩍슬쩍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Can I stop here for a moment?” 

잠깐 차 좀 세워도 되나? 

… 음?


목적지로 향하는 산등성이에는 멋진 풍경들이 많았다. 





“Super cool.” 

감탄 한번. 찰칵찰칵. 다시 출발. 장신의 폴란드 남자들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풍경 한번 쓱 보고, 감탄사 한번 짧게 날리고, 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했다. 내비게이션 방향도 맞았다. 이제 극한 긴장감은 누그러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완전한 무장해지는 하지 못한 채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락밴드로,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며 중간중간 즉흥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지난밤 나와 같은 숙소에서 묵으면서 숙소의 공용 거실에 걸어 둔 내 종이를 봤다고 헸다.  

     


그제야 그들의 자유로운 외모와 분위기가 다시 보였다.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차 안을 흐르던 음악에 심취하던 남자 넷. 다시 보니 노안이어서 그렇지 겨우 30대나 됐을까? 맞다, 지난주에 만났던 매력적인 폴란드 여성 산드라에 따르면 폴란드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투이스트가 많고, 유럽에서도 타투가 흔한 나라라고 했다. 그때 되게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We pass by here, so…” 

우리는 이 동네에서 서지 않고 지나가거든. 



나를 내려주고 떠나가는 차에 대고 나는 뒤늦게 열성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 오해해서! 고마워, 그 앙증맞은 차에 나를 태워줘서! 여행하면서 공연하는 거 너무 멋있다, 이 녀석들아! 폴란드 사람들 거 참 괜찮네! 



그렇게 순식간에 도착해 버렸다. 이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세이디스피에르뒤르(Seyðisfjörð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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