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이 넘은 아버지에게는 친구가 없다. 수년 전 그는 아들에게 “인생을 함께 할 친구가 있느냐?”라고 물었고, '둘셋 있다'는 대답에 “나는 평생 한 명도 없었는데 네 인생은 성공했구나” 라며 침통해했드렸다. 아버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수년째 병으로 누워있는 아버지와 노름쟁이 어머니, 가난한 시골마을 초가지붕 아래 칠 남매의 맡이. 가세가 기운 지 오래되었으나 내 아버지의 학업과 성공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부모가 자신의 교과서를 불태운 다음 날, 아버지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 허드렛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1년 동안 몰래 여비를 마련하여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그는 다섯 살 막내 동생까지 책임져야 할 가장이었으나, 지금 결단을 내지 않으면 곧 징집이 되어 공부와는 영원히 멀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그를 몰아세웠다.
여비가 떨어지고 허기로 길가에 쓰러지기도 여러 날, 그는 우연히 동향 사람과 마주쳤고, 그의 집에 임시로 거주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학업을 병행했다. 학교 소풍날 친구들에게 삶은 계란을 팔고, 밤낮으로 배달을 하였다. 이런 그가 부끄럽다는 학교 선배들에게 많이도 두들겨 맞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징집되었고, 이후 대입과 취업 등, 눈에 핏줄이 곤두선 체 전투하듯 삶을 헤쳐나갔다. 그에게 우정은 사치였다. 결핍과 자존심만이 그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 자신이 치열하게 살아왔으므로 그는 타인의 작은 태만도 용서하지 못했다. 자신 또한 일개 회사의 직원이면서 5분 지각한 회사 후배의 뺨을 갈겼다. 그에게는 회사 상사도 ‘게으른 녀석’이었다. 그는 소통하지 못했고, 남의 밑에서 일하지 못했다. 사회부 기자이자 논평가였던 그는 결혼 후 처가의 도움을 받아 지역에 신문사를 차렸다. (서른셋 아저씨의 강압으로 초고속으로 결혼을 하게 된 스무 살 꽃다운 우리 엄마의 이야기는 신파적이나 여전히 가슴 아프다. 그녀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처음 들어선 날을 잊지 못한다. 잘못되었다는 걸 단박에 알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남의 얘기라면 재미있게만 했을 텐데, 그는 나의 아버지이다. 그는 물기라고는 전혀 없이 비쩍 마른 몸에 눈에 살기가 가득한 채로 밤낮으로 담배를 피우고 신문 기사만 썼다. 그에게는 타인뿐만 아니라 아내도, 자식들도 다 ‘못난 것들’이었다. 사회에 거침없이 비평의 글을 날리듯 가족에게도 원색적인 비난의 칼날을 휘둘렀다. 집안은 늘 정적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엄마를 포함해서 우리 셋은 식탁에서 매일 혼이 났고, 나는 자주 체했다.
그는 여전히 듣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영화 ‘국제 시장’의 주인공 덕수(황정민 역)는 결국에는 가족과 화해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 고향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동네 친구들과 화투를 치는 것이 유일한 낙인 그는 그들조차 자신보다 하등한 인간으로 여긴다. ‘네깟놈들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라는 태도를 보이는 그는 마치 현실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참전 용사와 같다. 참전 용사는 집단이라도 되지, 그는 그의 세계에 혼자이다. 만일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다면 과거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허공에 뿌려댈까 두렵다. (아버지는 건강하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고 남을 호령할 줄만 아는 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입을 다물거나 떠났다. 유일하게, 20년 전 재혼한 그의 아내만이 그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화가 난다고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리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고, 문을 박차고 나가면 안 된다고. 그녀는 퇴직한 목사였고, 그의 고함을 두려워하지 않은 유일한 이었다.
다음 주, 새어머니는 지인들과 일주일간 중국으로 여행을 간다. 몇 달 전, 그녀는 제주도 여행으로 2박 3일간 집을 비웠다. 그동안 아버지는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밥이며 국이며 아무것도 꺼내 먹지 못했다. 삼일 째 되던 날 나는 아버지를 뵈었고, 아버지는 처음으로 밥 같은 밥을 먹는다며 허겁지겁 식사를 하셨다. 새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번 여행 전 나에게 아버지를 단 며칠이라도 부탁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 나, 5학년인 나의 작은 아들은 KTX를 타고 국내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이토록 장황하게 쓸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의 글방 커뮤니티의 주제가 '지난 한 주 돌아보기'였고, 나는 다만 ‘성질이 고약한 아빠와 다음 주에 여행을 간다. 그래서 이번 주에 그 일정을 짜느라 분주했다’라고 쓰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토해놓고 싶었나 보다. 일단 내뱉어야 떠날 수 있나 보다.
아버지는 여전히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신보다 겨우 한 살 어린 아내를 자신이 죽기 전까지 가사 노동으로 착취할 나쁜 남자다. 정치적으로는 나와 정 반대편에 서 있다. 동시에 평생 스스로를 섬에 가둔 외로운 남자이다. 자신의 나이 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한 꿈과 열망을 가진 자이며,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괴로운 자이다. 그리고 이제는 작아진 노인이다. 닿지도 않았는데 차에 스크레치가 났다며 현금을 요구하는 건장한 젊은이와, 전철역에서 우산에 부딪혔다고 배상금 오만 원을 내놓으라는 남자의 으름에 겁에 질려 지갑을 여는 무기력한 팔십 대 노인이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복합적이다. 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증오했으며, 여전히 그 시절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는다. 과거는 그저 봉인된 채로 흐릿해졌다.
어쨌든 여행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7년 전, 나는 1박 2일로 아버지와 난생처음 단 둘이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좋았다. 비록 아버지는 내가 심사숙고해서 예매한 연극이 시작됨과 동시에 하염없이 고개를 떨구며 졸고, 맛집이라고 찾아간 곳의 음식을 탐탁지 않은 티를 냈지만. 아버지와 걸었던 서촌의 골목길과 그날의 햇살이 나에게는 미화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후 매년 해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가는데 7년이 걸렸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나는 이제 길거리에서도 남에게 한 소리 할 수 있는 두 아들 맘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려워하는 두 여자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