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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게 빙의되어야 한다

'나'라는 캐릭터

by 딴짓

"일주일간 여러분은 여러분이 쓸 글 속의 인물들에게 빙의되어야 합니다. 들여다보시고, 함께 하시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세요.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아! 에세이 쓰시는 선생님? 선생님은 스스로에게 빙의되시면 돼요!" 눈을 찡끗, 줌 화면 속 선생님께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셨다.



글을 열심히 쓰지 않는 날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내 글은 발랄함과 날카로움을 잃은 채 쑥 숨어 버렸고, 나는 글이 사라져 버린 지점에 서서 어정쩡하게 맴돌기만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실은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총 4차 시 강의의 목표는 '원고를 완성하는 것.' 소설을 구상 중이라는 다른 이들이 대단해 보였다. 내게 유일한 선택지는 에세이뿐이었는데, 그렇다고 뭘 어떻게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2차 시 수업의 주제는 '캐릭터 잡기'였다. 새로운 뭔가를 처음부터 쓰려고 하니 막막했다. 결국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원고인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다듬기로 했다. 언젠가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었다. 같은 원고를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 벌써부터 피곤했지만 원고를 수십 번 다듬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한다는 많은 작가들을 생각해 봤을 때 내 푸념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캐릭터에 대한 질문지를 드릴게요. 이 50가지 질문에 답해 보세요. 질문에 답을 달면서 내 캐릭터를 분석해 보세요. 단답형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질문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에세이 쓰시는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바닥 끝까지 가보세요. 자신을 직면하고 직면하고 또 직면하세요. 스스로에게 묻고 묻고 또 물으세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주어진 질문 외에도 자신에게 얼마나 질문을 더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캐릭터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캐릭터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말이 나오고, 이에 상응하는 행동이 나오고, 습관과 성격이 보이며, 종국에는 그가 맞이할 운명과도 연결되거든요.
- 작가 맹현




"글 쓴 이의 마음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아 보여요. 아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아직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달까. 그러면 독자가 보기에는 좀 불편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거든요.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들여다보고, 오래 생각하고, 계속 글을 써 나가 보면 좋겠어요. 그렇게 숙성의 과정이 필요해 보여요." 이전에 내 원고를 본 편집자의 말이 떠올랐다. 역시 전문가들이란! 오늘 작가님의 말씀은 그때의 피드백과 일맥상통했다. 캐릭터의 생각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 그것은 그토록 기본적이며 중요한 과정이었다. 에세이라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나는 우선 작가님이 주신 50가지 질문에 답한 후, 나 자신에게 다시 묻기 시작했다.



1.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왜 책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 일단 그때의 일을 잘 매듭짓고 싶어. 흐트러진 원고가 아니라 하나의 책으로 잘 마무리하고 싶어. 가슴 벅찬 기억을 제대로 보존하고 싶고,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 책을 쓰는 과정을 통해 다시 그때로 돌아가 행복해지고 싶어. 그렇게 아이슬란드 여행이라는 과거를 현재, 심지어 미래와도 연결시키고 싶은 건... 어쩌면 절박한 집착에 가까우려나? 그래도 그러고 싶어! 그 시절의 내가 그냥 망각 속에 잠기지 않도록 말이야... 그러니까 우선은 나를 위해 쓰고 싶어.



2. (조금 순진한 생각이진 않을까? 책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 즐겁지 만은 않을 텐데? 음 뭐, 그렇다 치고.) 그런데 책을 쓰겠다는 게 그 이유만은 아니었잖아?

- 내 또래의 여성들에게 뭔가에 도전하는 것의 즐거움, 나의 경우는 '혼자 여행'이라는 것의 의미를 전하고 싶었어. 그런데...



3. 마무리가 너무 성급했지?

- 맞아. 돌이켜보면 내 경험이 가슴 벅찼기 때문에 그걸 일반화해서 말하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여러분도 도전해 봐요!'라는 말을 달고 말았지. 원고의 마무리에 그런 멘트들을 우르르 박아 넣었어. 지금 생각하면 겨우 20여 일의 여행 후에 그런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이 무안하게 느껴져. 하지만 그건 진심이었어. 짧은 여행이었지만 내게는 그 어떤 경험보다 강렬했거든. 그래도 여전히 전달 방식이 서툴렀어. 책의 마무리 내용이나 수위는 조절해야 해. 어쩌면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제안하는 내용 따위는 몽땅 다 들어내는 게 좋을 수도 있겠어. 그저 앞으로의 내 모습을, 작은 다짐을 담담하게 얘기하는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수도.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내 마음도 조금 편안해지네? 내가 좋아하는 책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에서도 보면 그 어떤 극적인 상황도, 억지스러움도 없잖아. 그런데 너무 좋잖아!



4.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맹현 작가님은 캐릭터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에세이에서 캐릭터는 작가 그 자신인데, 너는 널... 잘 알고 있니?

- 아,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뒷걸음을 치게 돼. 이런 질문에는 일단은 위축되거든. 자신감도 없어지고. 그런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내가 위축되었던 이유는, 나 스스로가 결국에는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약간의 욕망과, 그래야 하지 않을까 라는 타인에 대한 눈치까지 깔려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그 어떤 잣대를 거두고 '찌질하고 소심하고 감정 덩어리에, 카리스마라고는 1도 없는 존재지만 여전히 꿈을 찾아 기웃거리고, 그러므로 조금씩 나아가기는 하는데 아주 조금씩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내 상태에 대한 '인정' '직면' 혹은 '인식'에 대한 이야기라면... YES! 나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있어.



5. 빠른 인정, 좋아! 그런데 독자들이 그런 네 모습을 좋아할까? 그토록 사소하고 평범하고 인간적인 네 모습이 과연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독자들이 네게 기대하는 모습은 뭘까? 자꾸 말이 반복되는 것 같긴 한데, 여행 중의 웅장했던 마음과 달리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미비한 정도로 나아가고 있을 뿐인데 이런 나여도 괜찮을까?( =시시하지 않나 =내가 글 쓸 자격이 있나...?)

- 음... 자기 검열은 끊이질 않지. 그런데 뭐, 어쩌겠어. 그래서, 부족한 나라서 글을 안 쓸 거야? 그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최대한 솔직하게 쓰는 수밖에. 어쩌면 나에게는 그것밖에 없을지도 몰라, 솔직함. 그래서 일단은 외부적인 부담감을 거두고 솔직하게 다시 써보려고. 지난번 원고는 너무 힘이 들어갔어. 뭔가 메시지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컸거든.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지 뭐. 가벼워지자. 가벼워지자!



6. 에세이를 쓰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이 있다며?

- 어...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지금 내 얘기를 꺼내고 있는 게, 여행 얘기나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어. 심지어 옳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해. 현실과 맞지 않잖아. 전쟁이 끊이질 않고, 사회가 혼란스럽고, 국내외적으로 정신 나간 지도자들이 헤집고 다니는 이런 비정상적인 현실에서 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다는 게.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일단은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완성해 두자. 완성하고 그다음 단계는 생각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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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는 일주일 내내 나란 존재를 의식하며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그간 내가 얼마나 나 자신과 대화를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했는지를 느끼면서.






그리고 그 다음 주의 과제는 스토리를 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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