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매일 아침 같은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고 한다. 때로는 주변에 앉은 다른 손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는데, 밤새 있었던 일, 소소한 동네 소식, 각종 가십거리와 우스갯소리뿐 아니라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도 어찌나 재미있는지, 듣다 보면 어느새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곤 한다고 한다.
집에서 2분 거리에 24시간 무인카페가 있다. 새해에는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겠노라고 결심했지만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드는 일이 반복되었고, 오늘 아침, 나는 마음을 먹고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하늘은 컴컴했고, 알싸한 새벽 공기에 뿌듯한 마음이 올라왔다. 여섯 시 반이었다.
이 시간에 카페에 누가 있을까? 젊은 사람이 공부하고 있으려나? 건물 코너를 도는데 창가에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60대 중후반에서 70대 초중반쯤. 보라색 패딩 점퍼에 솜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평범한 아주머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탁자는 비어 있었다. 2인용 탁자 네 개가 오밀조밀하게 놓인 아담한 공간이었고, 나는 그녀의 옆옆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렸다.
20분쯤 지났을까? 일행이 나타났다. 비슷한 연령, 비슷한 복장의 아주머니셨다. 그들은 자주 보는 사이인 듯 어 왔어, 쓱 묻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크게 들린 것은 그로부터 20여분이 지난 후였다. 아주머니 2가 커피머신 앞을 서성였다. 내 자리의 정면이었기에 그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흠... 그러니까 고구마 라테가 커피 칸이 아니라 음료수 칸에 써져 있구먼. 고구마 라테... 고구마 라테..."
(...???)
큰 목소리가 왠지 어색했다. 그녀는 메뉴 분석이라도 하려는 듯 음료수를 종류 별로 중얼거렸다. 세네 걸음 너비밖에 되지 않은 카페 안을 꽤 오랫동안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분주한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세 번째 아주머니가 나타난 것이다. 어느새 밖은 환했고, 찻길에는 출근길 차량들이 이어져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더 지난 시간이었다. 여전히 손님은 우리들 뿐이었다. 세 번째 아주머니는 어깨에 들러 맨 배낭도 내려놓지 않고 성큼성큼 커피 기계로 다가갔다. 그리고 3초 후, "사용할 수 없는 카드입니다."
"어, 이게 왜 안되지? 딸내미 카드인데? 이상하다?" 그녀는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어! 나 지금 커피 마시려고 하는데 카드가 안 되네? 아 그래? 알겠어!" 그녀는 일행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상하게 안 되네? 이따 딸내미한테 물어봐야겠어."
(지금 따님분과 통화한 거 아니었나요...)
"여기서 카드 안 되면 딴 데 가서 마시지 뭐. 언니들, 가자!"
(여기서 안 되는 카드가 다른 데서는 되는 건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경청하고 있는 건데.
두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기립했고, 그렇게 셋은 사라졌다. 영화 트루먼쇼의 세팅장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브런치스토리 창을 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무인카페의 빌런.'
"주인이 하루종일 CCTV만 들여다보고 있게? 그러면 스트레스받아서 카페 못 하지. 그거 안 하려고 무인으로 운영하는 건데. 그냥 감안해야지."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출근 준비 중인 남편에게 조금 전 일에 대해 말했다. 남편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나는 의아했다. 테이블 네 개짜리 좁은 공간에서, 게다가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음료수 한잔 없이 있는 세 사람이 CCTV에 바로 보일 텐데 주인이 청소라도 하는 척 헛기침이라도 하면서 급습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이고! 그 이른 아침에 잠도 안 자고?" 남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OO동 무인카페에 있었는데?"
그때였다. 며칠 전 늦은 새벽에 들어온 아들에게 도대체 이 추운 겨울에 너희들은 어디에 가 있냐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를 때리고, 아파트 옆 공원에 잠깐 들렀다가, 옆 동네에서 친구를 만나 무인카페에 갔다는 것이다. 우리 집 앞 무인카페와 동일한 체인점이었다.
용돈을 받으면 주말에 홀랑 다 써버리고 다시 용돈을 받을 때까지 돈 천원도 아쉬워하는 녀석. 아들이 친구들과 무인카페를 전전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카페에서 아무것도 사 먹지 않고 그냥 자리만 지키는, 무. 임. 승. 차. 한 곳에서 죽치고 있기에는 눈치가 보이니까 이 동네 저 동네의 무인카페를 전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 죄다 검은색 패딩을 걸친 한 무리 사나운 눈빛의 십 대 청소년들의 존재는 새벽 시간, 카페의 다른 손님들을 쫓아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쯤 해서 자그마한 아주머니 세 명은 귀여울 정도.
그런 생각을 하니 빌런 삼인방에 대한 생각은 싹 사라졌다. 진정한 빌런은 내 아들일 수도 있겠구나. 나는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너네 혹시... 음료수 안 사 먹고 그냥 앉아만 있고 그러는 거 아니지?" 아들이 대답 대신 나를 노려봤다. 눈으로 욕한다는 그 look으로. 그래, 믿어야겠지. 모든 것은 나의 상상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삼인방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또 다른 카페로? 아니면 아침식사를 하러? 일하러? 아니면 오늘의 일정을 끝냈으니 각자 집으로? 그러나 저러나 오늘 내게 글 소재를 주셨으니 다시 만나면 무인 카페의 커피라도 한잔 대접해야 하나.
장사하기 참 어렵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