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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Mar 09. 2024

아이슬란드 대통령 영부인 만나러 갑니다

아줌마 혼자 갑니다

시작은 그 책 행복의 지도≫였다.

행복의 정의를 찾아 세계 곳곳을 방문한 미국 기자. 그가 방문한 여러 나라 중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경로가 아니라 실패 자체가 찬양되는 나라,’ ‘전 국민의 10%가 아마추어 작가나 음악가,’ ‘전 세계 독서율 1위’라는 ‘아이슬란드 편’을 읽으며 나는 난생처음 머리가 쭈뼛 서는 경험을 했다.



작년 3월, 중 3 아들은 다니던 학교에서 전학을 나왔다.

방황하는 아들을 보며 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별 볼일 없는 직장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닿지 않는 바닥으로 계속 고꾸라지고 있었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경로가 아니라 실패 자체가 찬양되는 나라.’ 나는 이 문장에 매달렸다. 가야겠다. 그냥 가야겠다 저 나라를.



가요! 꼭 가요!” “제가 다 떨려요!” “계속 응원할게요!” “아이슬란드행, 준비 잘 되고 있나요?”

방황하는 마음을 붙잡고자 들어간 글쓰기 커뮤니티. 온라인상에서 만난 사이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 대한 내 글에 진심으로 열광해 줬다. 매사에 흐지부지한 나는 그렇게 그녀들의 따뜻한 응원과 '혹시 이 여자가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매서운 참견, 그리고 격려에 힘입어 왕복 비행기표를 질렀다. 작년 여름이었다.



나는 쿠팡에서 세계지도를 주문해 벽에 붙이고 아이슬란드에 동그라미를 쳤다.

쉽게 잊고 포기하고 살아온 삶이 또다시 소리 소문 없이 나를 삼켜 버릴까 봐 억지스럽게 아이슬란드 관련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괜히 한 마디라도 글을 기록했다.



“Thank you for reading my book! 책을 읽어줘서 고마워요!”

나는 작가 출신인 아이슬란드 대통령 영부인의 책을 찾아 읽고, 그녀의 여성 연대와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찾아 댓글을 남겼다. 여기 코리아에서, 코리언 아줌마 한 명도 당신 책을 읽고 있어요! 그러자 그녀가 대댓글을 달아줬다. 남편은 정치인이든, 정치인의 와이프든 누구나 자기 홍보를 위해 인스타그램을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는 SNS 햇병아리 아닌가. 급 흥분 상태인 나를 내버려 두라고!  





꿈같은 나 홀로 여행 계획을 마음에 품은 일상은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찰 줄 알았다. 

그러나 전학 후 아들에게 크고 작은 문제가 들이닥쳤고 아들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마저 발생하면서 나는 또다시 무기력해졌다. “비행기표는 어차피 취소해도 되는 거잖아?” 남편의 무심한 말에 나는 화도 내지 못했다.



2024년 5월 15일 출발. 덜렁 항공권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

나는 컴퓨터 화면 속의 온라인 항공권을 흐릿하게 바라봤다. 가긴 가게 될까. 그렇게 나는 또다시 스스로의 꿈을 무기력화시키고 그러한 마음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평생 처음 다가온 꿈을 말없이 정리하고 있었다. 회사 일도 있고, 아이들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돈도 없는데 아이슬란드 여행은 너무 과하지 않나… 나는 형체를 잃고 꿀렁꿀렁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아이슬란드로부터 배운 것이 너무 많았다.

아이슬란드 여행 책부터 시작한 나의 독서는 여성, 인권, 자연, 역사로, 이후 일반 여행자와 여행작가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화산과 추위라는 자연적 한계 앞에서 아이슬란드인의 겸손과 수용이라는 삶의 자세는 나를 돌아보게 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고, 10년간 훌륭하게 임기를 이어간 것, 전 세계 남녀평등 1위라는 타이틀에도 ‘완전 평등’을 위해 오늘도 나아가고 있는 아이슬란드 여성들의 강인함, 용기, 위트와 연대는 살면서 흔들려 본 적 없는 나의 어떤 부분을 계속 흔들어 깨웠다. 문득, 나도 아이슬란드에 보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월 27일, 지난주 화요일 낮이었다.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아이슬란드 도서관'을 검색 후 즉흥적으로 메세지를 보냈다.



나 코리언 아줌만데, 5월에 여행 가는데,

내가 이래저래 해서 아이슬란드에 감동 먹었어.

그런데 간 김에 나도 한국 그림책을 소개하면 좋을 것 같은 거야...

나도 아이슬란드를 통해 도움 받았으니 말이야.

한 두 명 앞에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너네 나라 사람들의 10%가 작가일 만큼 책을 사랑하잖아.

그리고 그림은 언어가 달라도 통하는 게 있잖아.

나 이 분야 전문가 절대 아니야.

내 여행 계획에도 없었어.

그런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어떻게 생각해?


누군지 모르는 담당자님께.   



참고로 내 영어는 관광영어 수준이다.



순식간에 답이 왔다. 첫 줄에 한국말이 쓰여있었다.

안녕하세요!”



도서관 담당자 왈, 자신은 2016년부터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했으며, 아이슬란드의 한국어학과를 졸업했고, 올 가을에 고려대학교에 한국어 석사를 따러 온다는 것이었다. 마침 도서관에 한국어책 컬렉션을 준비 중이며, 이 일정이 확정되면 아이슬란드의 한인 사회와 자신의 한국어 지도 교수님을 통해 홍보할 것이라고 했다. 한인 커뮤니티의 장이 자신의 친구라면서.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Very exciting. very interested!






기쁨과 공포가 동시에 휘몰아쳤다.

나의 사심은, 상상 속 장면은, 아이슬란드 현지인의 집에서 한 두 명의 사람들과 맛있는 쿠키를 먹으면서 한국 그림 동화책 한 권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DM을 보낸 곳은 수도에 있는 시립 도서관이었다.



한인 사회? 한인이 있어?

그들은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데, 한국에 대한 한 번의 안 좋은 기억이 외국인들에게는 평생 갈 텐데, 내가 망치면 어떻게 하지? 나는 그림책 전문가도 아니잖아. 영어가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말해본 경험도 없고….

 



+-


난리난 그림책.’ 누군가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소개해준 동네 그림책 모임.

시작한 지 3개월 된 그 모임의 톡방으로 나는 달려갔다. “제가 사고를 쳤어요…”

2주에 한 번 있는 오프라인 모임이 있는 어제, 뒤늦게 도착한 그곳에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그녀들은 열광했다.



우리는 1시간 반 만에 다섯 가지 주제의 그림책 큐레이션을 구성하고 - ‘한국 문화’ ‘아름다운 한국의 그림책’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 – 외국 수상작 및 해외 작가와의 컬래버레이션’ ‘fun & comic’ 그리고 ‘위대한 여성들’ - 각 주제별 책을 선정했다. 한국의 전통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한국 책의 위상을 보여주자고 했다. 현장에서 쓰일 책을 발표 일주일 전 항공편으로 보내 도서관에 부스를 만들어 전시하게 하자고 했다. 그림책은 내가 한국어로 한 줄, 도서관 사서가 아이슬란드어로 한 줄씩 번갈아 가며 읽는 방식이 제안되었다. 이메일에 써 있는 도서관 담당자의 이름 'Lilja Rut Jónsdóttir'를 읽기 어려워 우리는 '박릴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건 릴자 시키자. 한국어를 하니까." "나중에 릴자 한국 오면 밥 한번 먹여야겠다!"



   

성인 타임과 어린이 타임을 위한 각각의 굿즈도 기획했다. 참여자들의 이름을 한글 캘러그래피로 써서 부채와 액자를 선물하기로 했고, 한글 자모음 도장 찍어보기 체험을 기획했다. 한국의 줄타기 동화책을 보여 주기에 앞서 줄타기 영상을 보여주기로 했다. 소개될 책의 출판사에 연락해 표지 파일을 받고, 모든 계획을 SNS에 홍보하고, 이와 관련하여 후원을 받는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책을 구입하는 등의 비용이 필요하고, 구입한 책은 현지의 시립 도서관에 기증하면 좋을 것 같았다. 아이슬란드 대사관 혹은 영사관에 연락을 해 보고, SNS를 통한 후원도 도모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이 책 세 권은 영부인에게 줘요.”

그림책 모임의 최고 브레인이 시크한 표정으로 책 세 권을 내밀었다. 엄마는 해녀입니다≫를 포함해 한국의 용감한 여성에 대한 책이었다.



이 사람들은 미쳤다.

대단히 뛰어나고, 거침이 없으나 섬세하고, 기획력과 행동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자들. 아, 여인네들이여.   

내 일, 네 일 구분하지 않고 두 손 걷어붙이고 함께 하는 이 순간. 우리는 이미 한 팀이었다. 능력이란, 능력자란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 흥분과 즐거움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네들의 뺨이 너무 예뻤다. 그네들의 모습에서 나는 언뜻 영화 매드맥스가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됐다는 경직된 한일관계가 욘사마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일본 할매들로 인해 무너졌다는 예전 뉴스도.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출연한 샤를리즈 테론





실은 이제 고등학생이 된 큰 녀석에게 또다시 엄청난 문제가 생겨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터였다. 또다시 삶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던 때였다.



좋은 소식과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나는 아들이 처한 상황에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신난 내 모습에 겸연쩍어져서 조심스레 상사에게 말을 꺼냈다.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장황하게 이야기한 후 아이슬란드 계획 및 ‘난리난 그림책’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윽 내밀었다. 철없는 엄마 같은 느낌을 줄까 봐 들뜬 티를 최대한 숨기고.



“나는 나지! 아들은 나의 삶에서 아주 일부이고. 그리고 OO이에게 일어난 일은 OO이의 삶에서 아주 작은 일이니, 결과적으로 지금 아들에게 생긴 일은 나의 현재에 대단한 영향력이 없어. 백분의 일이나 될까? 그러니 거기에 휘둘리지 마. 하나씩 해결해 가자고. 그리고 아이슬란드 너무 신난다! 소름 돋아! 그리고 그 엄마들 말이야, 드디어 공동체의 맛을 봤구나!”





“저... 망하면 어떻게 하죠?”

“망하면? 한글 자모음 도장이랑 한글로 써 준 이름 종이 뿌리고 와요. 그것만으로도 성공이야, 아하하하!!!”

“그럼 그럼! 푸하하하~~~”


어찌나 시크한 ‘난리난 그림책’ 여러분들인지. 걱정 따위는 그들에게 내밀 수도 없다.  





그렇게 올 5월 15일. 나는 2주간의 여행을 떠난다. 나를 응원해 주던 글방 커뮤니티의 여자들, 그림책 모임의 여자들, 나의 20년 지기 멘토이자 상사인 그녀… 그녀들의 영혼을 어깨에 태우고 간다.



그런데 영부인은 만날 수 있으려나? 인구 38만 명, 내가 사는 시의 삼분의 일밖에 안 되는 인구. 그중 70%가 수도에 모여 산다. 거리에서 쉽게 유명인을 마주치기도 한다는데. 흠, 흠, 흠... "왜 안 되는데? 혹시 모르잖아? 못 만나면 말고! 핫핫핫!!!" 그녀들의 목소리가 왕왕 들려오는 것 같다.



아! 혹시 대사관을 통한 후원이 여의치 않으면 브런치 작가님들께 SOS를 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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