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이 어긋나도 괜찮아 용궁댁이 있잖아
충남 아산 용궁댁과 함께하는 소나무 숲길 산책
by
천둥벌거숭숭이
Oct 1. 2024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온몸으로 낯을 가리는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처음 가는 집도, 처음 만나는 수돗물에도 낯가림을 한다.
심지어 중학교 1학년 새 학기.
초등학교 6년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보다 넓어진 인간관계, 낯선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 작용으로 오른쪽 얼굴에 편마비가 와서 6개월 동안 한의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지로 대학을 가고 기숙사생활까지 한 것은 낯섦을 이겨내려는 갸륵한 나의 노력.
잘 적응해오고 있다는 믿음이 무색할 만큼 힘겨운 적응기를 겪고 있다.
그래도 처음이 좋은 이유는,
낯섦이 주는 설렘과 나의 틀을 깨어주는 신선하고 다채로운 사람들, 서로에 대한 기대감이 없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들보다 쉽게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어두운 새벽에도 닭은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이렇게 일찍 사람들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에 창밖을 내려다보면 벌써 일어나 밭일을 시작하고, 마당을 쓸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내가 몰랐던 이야기들.
직접 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른 이들보다 아침을 일찍 여는 사람들.
새삼 그동안 나는 내 삶에 안주하며 게으르게 삶을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적인 일을 하자.
그렇게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주는 좋은 에너지를 받으며 힘찬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에게서 너무도 생경한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에서의 취향살이.
대망의 이튿날이다.
오전 일정으로 식물원 방문이 있었다.
온실에서 푸릇한 식물들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입구에서부터 금지당한다.
충남 아산 도고면의 식물원은 하계(7~9월)에는 주5일 운영을 합니다
세계꽃식물원
충남 아산시 도고면 아산만로 37-37
그냥 식물원인줄 알고 갔는데 찾아보니 세계꽃식물원이다.
역시 알고 나면 흥미가 생긴다.
하지만 오늘은 문을 닫았지.
매일 문을 열지만, 7월에서 9월까지 여름동안은 주 5일만 운영한다.
너른 주차장이 눈앞에 있었지만, 그 문은 굳게 닫혀있었으므로 다음을 기약한다.
일정이 어그러지면 어때.
그럼 다른 곳을 가면 되지.
용궁댁 들어가는 입구
아산용궁댁
충남 아산시 도고면 도고산로587번길 73-21
조선시대 1800년대 초 경상북도 예천군의 용궁현감을 지낸 성교묵이 건립한 가옥이다.
벌써 200년이나 된 조선시대 후기 건축물.
용궁댁 가는 길은 도고산 둘레길과 결을 같이하고 있었다.
식물원에서 볼 수 있는 식물보다 더 큰 소나무 숲이 함께한다.
강렬한 햇살을 막아주는 높디높은 소나무가 주는 시원한 그늘이 좋다.
국가민속문화유산 용궁댁의 모습
국가민속문화유산이면서 사유지인 용궁댁은 무료로 자유롭게 이용가능하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고, 잘 관리되어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볏짚을 엮어 만든 초가집이 정겹다.
예전에는 불도 안 들어오던
초가집을 이제는 전기를 연결하고 수도를 끌어와 현대의 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과거와 현재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
용궁댁은 안채와 바깥채, 사랑채를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 건축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모든 것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것.
반대로 그
덕분
에 도고산 둘레길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것.
정원은 아니지만, 용궁댁의 너른 마당을 감싸는 소나무와 그 밑을 부지런히 오가는 닭들을 만날 수도 있다.
자연친화적인 용궁댁.
오늘 용궁댁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일정이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수습하는데 하루가 간다.
그다음을 잘 해내는 것이 그 사람의 하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용궁댁의 마당은 사진찍기 명소
큰 소나무와 작은 소나무.
소나무에도 종류가 여럿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마당의 모습.
푸른 잔디와 풍성한 소나무 잎사귀.
서서 찍어도, 앉아서 찍어도, 잔디밭에 드러누워도 예쁜 사진을 간직할 수 있다.
힐링을 찾고 싶다면 바로 여기로 오세요.
소나무 숲길은 쉽지않다
분명히 소나무 숲길이라고 했다.
등산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식물원에 간다고 청치마를 입은 나의 기대가 어그러진 곳.
그래도 운동화를 신고 온 것이 바로 신의 한 수다.
평소에는 잘 관리된 길이었을 테지만, 저번
주말 전국적으로 내린 가을장맛비로 길 곳곳에 물길이 나서 걷기가 상그러웠다.
소나무 숲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는 운동화, 슬리퍼, 그리고 로퍼를 신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불만 없이 걷는데, 청치마가 대수랴.
양손에 치맛단을 부여잡고 부지런히 산길을 걸었다.
입구부터 함께했던 자갈 밟는 소리가 소란하다.
자글자글. 혼자 걸을 때는 들을 수 없었던 서로가 보폭을
맞추는 소리.
차분하면서도 경쾌한 그 소리가 나를 앞으로 안내한다.
20분 내외의 길지 않은 산책길이었지만, 오랜만에 하는 등산은 나의 땀샘을 자극했다.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쉴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여럿 보였다.
오늘의 종착지.
이미 내 앞에서 걷던 사람들은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힘들지만 좋은 그런 느낌.
도심 속의 매연, 갑갑했던 공기들을 마음껏 배설하고 나니, 온전히 순수한 나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도고산 둘레길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경쾌하다
역시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욱 즐겁다.
물론 내려올 때 더 신중하고 조심해서 내려와야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신나는 마음에 바삐 걷다가 왼쪽 발목을 삐끗한 것은 부주의한 내 잘못이지.
한 번 다친 발목은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
소중히 대해야지.
그렇게 다시 천천히 내려오면서 주변 경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레길의 입구에는 보호수와 그 앞에 위치한 장작이 함께 한다.
보호수와 인간의 동상이 함께하고 있었다.
쭈그린 사람, 상체만 있는 사람, 앉아있는 사람.
나체의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이것 또한 예술의 한 자락 아니겠는가.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만들어진 모양에 단지 보는 사람으로서 상상력을 덧대어 본다.
보호수 바로 옆에 있는 나무토막 더미가 신묘하다.
나무가 이렇게 쓰임새가 많다.
지켜야 하는 나무와 필요로 하는 나무.
물론 다른 종류의 나무겠지만, 그 존재의 이유를 되새기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떤 가치 있는 존재인가.
사색이 늘어만 간다.
닭갈비도 맛있고, 풍경도 맛있는 도고의 낮
둘레길을 걷고 난 후 먹는 밥맛이 꿀맛이다.
요즘 밀키트가 참 잘 나온다.
닭갈비 포장을 뜯어
굽기만 하면 뚝딱이다. 더 맛있게 먹는 방법에는 깻잎이나 양배추를 곁들여 먹는 것.
배부르고 날씨가 좋으면 나는 빨래를 하지.
그렇게 세탁기에서 때를 벗겨낸 세탁물을 옥상으로 가 건조대에 걸어 햇볕소독을 한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애국가 가사처럼 공활하다.
알찬 점심시간을 보내고 설레는 글쓰기 강의 시간에 맞춰 숙소를 나섰다.
글쓰기 편의 강의 한 자락과 모두가 다양한 의견을 냈던 치열했던 회의시간
글쓰기의 시작은 기록이다.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일기를 쓴다.
글쓰기 편에는 다양한 강의가 함께하고 있었다.
바로 첫 번째 강의.
이야기의 시작이 흥미로웠다.
나 자신을 인정하기.
내가 나를 오롯이 인정할 때에 쓰고자 하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명확한 주제, 다른 글과의 차별점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를 담아낸다.
학창 시절에는 싫기만 했던 시골살이가 사실은 좋은 자양분이었다는 것을 글로 풀어내어 지금은 어엿한 독립 출판사 대표님이 된 강사님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지역의 색을 담은 이야기.
같은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점도 참 좋았다.
다양한 글쓰기가 존재하는구나.
나의 시각이 더 넓어지는 중이다.
그렇게 알찬 강의를 끝내고, 글쓰기편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회의가 시작되었다.
각자의 다양한 의견들이 모여 투표를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진솔한 시간을 가졌다.
기나긴 설전 끝에 결국은 무(無)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한 가지를 결정하는데 여러 사람이 모이면 정말 많은 의견이 나오고, 그 의견들을 수렴하는 데는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한다.
다들 알찬 결과물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가지는 욕심이 아닌가 한다.
장대한 시작보다는 간결하고 깔끔한 결과물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기대한 것 이상의 하루였다.
낯가림의 연속.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용기.
그렇게 꺼내본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 순간.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양가감정이 피어올랐다.
숙제가 많아지면 힘들어지는 학생처럼.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때는 저걸 다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내가 자신 없어하는 장르의 글을 써야 하는 두려움, 그래도 해야 한다는 걸 아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
정말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니 다시금 나의 좁았던 생각의 틀을 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의견들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신감이 엿보였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
아마 나도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오전의 푸른 산책길, 오후의 알찬 강의. 그리고 회의.
하루가 길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더욱 명확해졌다.
낯섦에서 오는 나의 용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오늘은 꽤나 성공적인 하루를 보낸 셈이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 용기가 나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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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도고 취향살이 나를알다
01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을 가게 된 사연
02
일정이 어긋나도 괜찮아 용궁댁이 있잖아
03
맛있는 식사는 여행의 기억을 아름답게 만든다
04
타인의 취향을 엿보는 가장 좋은 방법
05
365일 꽃이 피는 곳
충남 아산 도고 취향살이 나를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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