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당의 선택으로 만들어낸 어느 하루

시시각각 변하는 변덕쟁이는 화려한 수국과도 같다

by 천둥벌거숭숭이

나는 엄마의 이름을 부른다.

심지어는 만들어서 부른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것.

직책과 사회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아닌, 온전히 자신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은 쉽고 명쾌하다.

오늘 그녀의 이름은 정당당이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만드는 힘은 당당한 태도에서 출발한다.

오늘의 정당당은 임랑 바다에서 오시리아까지 걷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에게 임랑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오시리아까지 걷는 길은, 갈맷길 1-1과 1-2코스를 함께 걷는 것으로, 한 코스당 4시간을 상회하는 시간이 소요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직접 걸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각자의 백팩을 준비하고 생수병 2개, 선글라스와 모자, 목에 감을 손수건을 챙긴다.

겨울이지만, 부산이다.

비교적 얇은 겨울 외투를 꺼내고 엄마의 무릎에 보호대를 채운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임랑해수욕장. 갈맷길1코스 시작점
강과 바다가 만나면 꽤나 잔잔하다

무언가 새해를 맞이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는데 최적의 장소를 찾은듯한 기분이다.

갈맷길의 제1코스의 시작점. 임랑해수욕장.

이미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스타벅스의 주차장은 만석.

역시 좋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주차자리는 없지만, 우리는 걷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이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차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지만, 어떠한 저항이나 거부감 없이 조용히 섞이고 있다.

잔잔한 물결과 작열하는 태양이 만들어낸 윤슬만이 화려함을 뽐낼 뿐이다.

조용하지만 찬란하게 시작되는 올해를 담담히 맞이하는 정당당의 선택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갈맷길의 시작을 알리는 스탬프를 찍을 종이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 저장이다.

갈맷길 1-1코스는 차와 함께 걷는 길, 코스 변경 알림판은 확인필수.
묵묵히 일하는 등대와 쉬어도 일하는 선박의 모습

해안 드라이브길과 함께 걷는 갈맷길은 부산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길이기도 하다.

길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함께 가는 길이지 누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

좋다. 그런 마음이라면 충분히 누릴 준비가 된 것이다.

제한속도 40의 도로지만, 페달을 밟기만 해도 전진하는 드라이버는 속도조절이 쉽지 않은가 보다.

자칭 베스트드라이버지만, 타칭 도로 위의 범법자들은 오늘도 위법하게 도로 위를 누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인도로 걷다가 바다가 가까운 길로 닿으면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갈맷길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임랑에서 문동으로 가는 코스 중, 해변 가까이를 걷는 길을 안전상 우회하도록 권하는 내용이다.

나무 울타리와 데크로 걷는 길이 참 좋지만, 돌아가더라도 안전이 최우선이다.

덕분에 천천히 부산 바다와 길을 즐길 수 있다.

밤에 존재감이 확실한 등대는 낮이면 사람들의 포토존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다.

기둥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배는 다음 출항을 위해 준비 중이다.

바다 위를 부드럽게 유영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따개비들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같이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살아남는 것도 중요한 시대다.

문동방파제와 문중방파제. 차들로 가득한 칠암항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맞이하는 해변마을 입구

바다를 보며 걷는 길이 참 낭만적이다.

잊었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늘 가까이 있으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정당당의 거침없는 도전과 모름에서 오는 순수함에 기인한다.

마주 보는 방파제가 있어, 덕분에 등대까지 마주 보고 서 있다. 액자에 담을 필요 없이 바로 가슴으로 간직한다.


언제나 한산하게만 보였던 칠암 붕장어 거리도 주말에는 사람으로 가득하구나.

빽빽이 늘어선 차들을 보니, 세상에는 좋은 것을 함께하고픈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각자의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겉으로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다.

언젠간 나도 저 안의 아무개가 되어 평범하지만 여유로운 사람이 고프다.

갈맷길을 걷는 사람은 마을의 입구를 출구처럼 지나가지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정승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나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부산 버스 투어도 추천여행으로 제격이다
목표였던 오시리아역은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

그렇게 마냥 걷다가 불현듯 정당당은 포기를 선언한다.

이름값을 하는 정당당은 쉬이 변덕스러운 수국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좋은 시도였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현명한 판단이 자신이 갈 길을 이끄는 것이다.

낯선 정류장에 서서 남포동으로 가는 버스노선을 찾는다.

부산은 버스환승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좋다. 덕분에 부산 시내를 야무지게 누빌 수 있게 되었다.


기장 3번 마을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역에 내려 맞은편 정류장에서 1003번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때론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관광객인양 창밖에 코를 대고 바라보는 풍경이 재미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오늘의 목표지점이었던 오시리아를 포착한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하루. 정당당이 선택한 하루가 바로 그러하다.

주말의 남포동 풍경

해운대와 광안리, 부산역을 지나 남포동까지 이르는 1003번 버스는 부산사람보다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노선이다. 덕분에 여행하는 기분이 우리에게도 번져온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부지런히 오고 가는 사람들.

쉼 없이 일하는 전봇대의 전류들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주택가들이 산꼭대기까지 이어지는 풍경.

낮과 밤의 색이 다르고, 지나는 사람들의 언어가 가지각색이다.

돌연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언제나 낯설게 느껴지는 남포동을 좋아한다.

부산에 살아서 다행이고, 정당당과 함께여서 좋은 순간이다.


좋아하는 간식이라도 손에 쥐어주고 싶어 들른 김영상회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곤약젤리 매대가 비었어요. 누가 다 사갔나요.

언제나 부지런한 존재들이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좋아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조금만 배를 채우면 괜찮을 법했던 위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삐뽀삐뽀. 변덕쟁이 정당당이 배고프다며 아우성을 친다.

갑작스레 선지가 먹고 싶다는 요청에 마음과 발이 동시에 바빠지기 시작한다.

오래도록 가보고 싶었지만 혼자여서 가지 못했던 그곳으로 향한다.

자갈치시장 선지국 골목 맛집 영덕집
신선한 선지가 일품이었던 영덕집 선짓국

자갈치 시장의 먹자골목에 위치한 선짓국 가게는 언제나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혼자는 겁이 많지만, 함께라면 두렵지 않다.

빈자리에 앉아 "사장님 선짓국 2개 주세요." 외치니, 국수인지 밥인지 물어보셨다.

에이, 면보다 밥이지요. 애살있게 사람들을 대하는 사장님의 모습에서 관록이 느껴진다.

반주로 드시는 사람들에게 국물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찬을 더 줄까 묻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금방 나온 선짓국에서 고소한 기름향이 물씬 풍긴다.

매운맛을 좋아하므로, 당당히 양념을 많이 달라고 하였다.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용감하다.

양념이 정말 매우므로 다음에는 적당히 넣어달라고 해야지 마음을 먹었다.


다큐프로를 자주 보는 편이다.

이곳 선짓국 골목이 나온 영상을 기억한다. 단체로 같은 메뉴를 장사하기에 물류의 공급처가 정확하고 질 좋은 선지를 고객들에게 내어줄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던 상인의 인터뷰가 생각나는 맛이다.

언제나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아 잦은 빈혈을 앓는 나는 철분제를 매일 챙겨 먹어야 하는 사람이다.

내 몸에 부족한 영양소는 스스로 갈망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선짓국 그릇이 가득한 것을 보고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걱정은 기우일 뿐.

깨끗이 다 비우는 말 잘 듣는 손님이 되어 선짓국 파는 이를 즐겁게 해 주었다.

특히 곁에 있던 정당당이 속삭이듯 뱉은 "이 집 잘하네."를 들어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자갈치 바다풍경과 영도다리

채워지지 않는 감정의 빈곤을 잠재우는 일은 때론 매우 쉽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 가령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다던지,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일 등등.

그릇 가득 채워주신 인심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 무리한 식사였지만, 그래도 좋다.

자갈치에는 걸으면서 소화시킬 장소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갈치 수산시장의 뒤편에는 낚싯배들이 밤 항해를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많은 곳으로, 어르신들의 놀이터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구경에 눈길이 간다. 각자의 이야기가 녹진하게 배어 있는 장소를 참 좋아한다.


바다와 영도다리,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부산이라는 곳은 참 신기하다.

바다와 산을 이렇게 야무지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산등성이까지 비집고 올라가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장에 나가 무엇이든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

그 속에 정당당의 가족들도 있었다.

피란민으로 영주동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금정구로 터전을 옮긴 가족들.

육성회비가 없어 학교에서 매일 맞았다는 정당당의 지금은 무엇이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더 일찍 배웠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더 좋은 것 아닌가.

무엇이든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존재가 곁에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뒷받침해 주는 사람이 제 편이라 다행이다.


정당당의 선택으로 시작된 하루는 그녀의 일생을 반추하는 오늘로 기억될 것이다.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 않고 실행하는 정당당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의 엄마는 언제나 당당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