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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May 09. 2024

어린 시절 향수를 부르는 좀머씨 이야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글에 짙은 향기가 묻어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글이 그러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길 싫어했고 혼자만의 방으로 들어간 삶을 산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짙은 고뇌와 향수가 그의 글에 진하게 배어 나왔다.

어린 시절 자주 가던 책방이 있었다.

그 책방의 이름이 바로 좀머씨 이야기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좀머씨 이야기


주인공인 나는 키도 조그맣고 몸무게도 적다.

학급 친구들과 동네가 달라서, 하교시간이 되면 우르르 몰려나가는 친구들 사이를 지나 홀로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감을 가진 여자아이가 다음 주 월요일 엄마 친구가 있는 동네로 가야 하므로 하굣길을 함께하자고 말한다. 그날부터 나는 바빠진다.

그녀와 함께 지날 길을 물색하고 같이 먹을 간식을 엄마의 간식창고에서 훔쳐 자기만의 아지트에 숨겨놓았다.

결코 짧지 않은 주일을 보낸 다음의 월요일 하교시간.

여자아이들만 듣는 특별수업시간을 말없이 기다리고 1시간이 지나 곧 그녀가 나온다.

갑자기 엄마 몸이 좋지 않아 엄마친구 동네는 가지 못하게 됐다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그녀.

미리 말해주었더라면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나는 아무 말하지 못하고 터덜터덜 그저 제 갈길을 갈 뿐이다.

그녀와 함께 한 시간보다 그녀와 함께 보낼 시간을 그려냈던 소중한 일주일이었다.


동네에서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

좀머 아저씨.

긴 막대기를 제 몸처럼 이끌며 하루종일 부지런히 걸어 다닌다.

쉬지 않고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내가 싸주는 빵 한 조각과 물, 우비 하나를 가방에 넣고 무작정 걷기만 한다.

누군가 말을 걸면 더듬거리거나 알아듣지 못할 말을 뱉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박이 쏟아지는 날 좀머씨를 걱정한 아버지가 차에 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온전한 문장을 내뱉는 좀머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상투적인 질문.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요.

좀머씨의 대답 "그러니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오."


내가 배우고 싶지 않았던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내 몸보다 큰 자전거를 타고 수업을 들으러 간다.

가는 도중에 만난 무서운 강아지의 방해, 길을 막는 행인, 다른 날과 다르게 우여곡절이 많은 날이었다.

10분을 지각하니 선생의 눈초리가 매섭다.

피아노 수업을 듣는 도중 선생이 코를 풀다가 무심코 코딱지가 내가 쳐야 하는 건반 위에 떨어졌다.

그것만은 내 손으로 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실수가 늘었고, 선생은 분노했고, 나는 오해받고 아주 나쁜 아이로 비난받았다.

작은 실수가 엄청난 비난으로 돌아온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늦은 이유를 들어주지 않은 피아노 선생, 나에게 맞는 자전거를 사주지 않은 어머니,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형과 누나들, 무섭기만 한 아버지에게 상처 주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높은 나무를 힘겹게 오른다.

내가 먼저 떠난다면 나의 장례식에 와서 다들 슬퍼하겠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후회하겠지.

좌절한 마음을 안고 내려다본 나무 아래를 지나는 좀머 아저씨.

그날 나무 위에서 몰래 바라본 좀머 아저씨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 좀머 아저씨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왜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을까. 왜 나에게 상처를 줄까.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후회하게 되겠지.

펑펑 울면서 반성하겠지.

그들에 대한 나의 기대가 컸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혼자서만 생각한 일.

그러다 마주한 좀머씨.

시대적 아픔을 경험한 좀머씨는 지금으로 말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전쟁의 상흔은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 마음을 알았기에 혼자 살림을 돌보던 좀머씨의 아내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았을까.

좀머씨 자신도 끊임없이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그렇게 걸어간 것 아닐까.

쏟아지는 우박에도 그저 묵묵히 앞을 걸어갔던 좀머씨.

"그러다 죽겠어요."라는 말에 "그러니 날 좀 그냥 내버려 두시오."라는 답변이 나오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고뇌에 시달렸을까.

주인공인 나는 생각보다 좀머씨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는 않았다.

함부로 그를 말하지 않았다.

용서는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사람의 몫이다.

제멋대로 용서를 구하는 세상에게 그가 보인 행동은 어쩌면 무례하게 보일 수도,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을 만큼 이상한 것 투성이다.

모든 문제에 정답이 없듯이 그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간 것 아닐까.

짧은 글이었지만 그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내 어린 시절의 향수가 느껴졌다.

나도 그때는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조금의 위안도 받았다.

누구나 한 번쯤 고민했던 일들이 다른 사람들과 겹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있는 것처럼.

 당시 내가 택했던 최선의 선택에 후회는 하지 말자.

그리고 오늘을 묵묵히 살아내자.

당신의 어린 시절이 궁금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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