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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May 13. 2024

내 어릴 적 소원은 말이야

아주 소소한데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은 없어

나는 항상 꿈꾸곤 했다.

큰집에 갈 때마다 하는 상상.

멋진 차를 타고 온 사람이 나를 데리러 오는 상상.

친척들 많은 틈바구니에서 오로지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

명절, 주말 심심치 않게 큰집에 가곤 했다.

항상 친척들로 바글바글했는데, 항상 아빠는 가지 않았다.

귀찮다는 게 이유였다.

솔직히 자기 형제들에게 얼굴을 비치기에 부끄러워서 자신은 가지 않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자식인 나와 동생, 엄마만 큰집에 가곤 했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훗날 커서 엄마에게 들어서 알게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엄마는 항상 나한테만 심부름시키는 큰집어른들이 싫었다고.

나는 참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한테 어른이 무언갈 시키면 빠릿빠릿하게 나서서하곤 했다.

이쁨 받는 게 좋을 나이.

칭찬 하나에 하루가 즐거워지는 아이.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 당시의 나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친척들이 가득 있는 그 장소에 특별한 사람이 당당하게 나를 데리러 오는 꿈.

마치 내가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된 것 같고, 나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

그 꿈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큰집에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는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스물한 살의 따스한 봄이었다.

당시 나는 '안'이라는 작은 펍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들려온 소식.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주말이라 바로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거기서 처음 경험했다.

사람의 체온이 서서히 차가워지는 것.

결국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온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스물한 살은 치열한 시절이었다.

3일의 초상에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학교 수업도 다 들었다.

참석하지 못한 것은 '안'이라는 알바자리였다.

경황없음과 거절의 어려움에 친구에게 알바를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했다.

그게 내가 살면서 처음 해 본 부탁이라는 것이다.

친척 중에 내 또래들은 학교를 다 쉬었다.

학교에 조모의 사망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하루종일 장례식장에 있을 것도 아니고, 내가 수업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큰엄마는 싹수없다고 욕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매정한 것들이라고 욕을 했다.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그들만큼의 애정이 없었을까.

아니, 그들만큼 할머니에게 애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고3시절.

학교 다니기에도 바쁘던 시절.

밤 10시까지 꽉 찬 시간표. 주말에도 학교엘 갔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큰집에 들렀던 적이 있다.

아빠가 너무 제멋대로라 어른인 할머니에게 아빠 좀 혼내달라고 부탁하러 간 자리였다.

할머니는 다 큰 어른을 혼내는 것은 안 될 말이라며 훌쩍 우는 손녀의 손에 돈 만원을 쥐어주곤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때 할머니를 향한 내 눈물은 다 말라버렸다.


그리고 할머니 장례식은 끝이 났다.

큰집에서 제일 힘 있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아버지는 그다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해 추석, 할머니가 없는 자리는 조금 휑했지만, 다들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다 해내고 있었다.

제사를 다 끝내고 난 후, 밥도 먹고 그냥 자리에 앉아있을 때였다.

큰엄마가 소파에 앉아 나를 불렀다.

그 당시 나의 집은 해체 중에 있었다.

나의 부모는 이혼절차를 마쳤고, 따로 살고 있었다.

이혼한 그 해 맞이한 첫 명절에 나를 불러서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엄마에 대한 욕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아빠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생각이 없네, 너네들은 정이 없네.

모든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그런 소리들을 해댔다.

모두 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울 수밖에 없었다.

존재자체로 죄인인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수치심과 억울함, 결코 용서 할 수없는 분노를 느꼈다.

마냥 울기만 하는 내 손을 잡은 동생과 함께 큰집을 나왔다.

나에게 큰엄마는 아주 나쁜 사람이고,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든 이들은 같은 공범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 내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이 사라졌다.

나와 동생이 큰집에 가지 않으니, 그다음 해부터는 아빠가 꼬박 참석하고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렇지 않다.

감정은 휘발성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커다랗던 미움과 원망, 분함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냥 처음 대면하는 남같이 느껴질 뿐이다.

신기한 것은 가끔씩 그 사람들을 마주친다는 거다.

가끔은 인사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과 조금도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공범자는 영원히 공범자다.

나에게 그들은 완벽한 타인.

나의 '안'에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내 생애 단 한 번도 내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내 '안'에는 아무도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옛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행복한 가정이 아니어도 행복한 내 '안'을 만들어내는 하루를 매일 살아내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의 평생 과업이 그것이다.

그래서 '안'이라는 곳에 들어갔던 것일 수도 있다.

할머니 장례식장에 가는 일만 아니었더라면 더 오래 일할 수 있었을 텐데.

생애 첫 알바라 실수투성이었고, 그로 인해 사장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별일 없이 끝났지만,

나의 '안'은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혹시나 또 그런 소원을 가지게 된다면, 내가 이루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누구보다 바쁘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

한 여름밤의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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