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과 싸우던 친구를 만나다

퇴사자 생활 지침서

by 변준수

회사를 떠날 때 멋지게 사직서를 내고 자유로운 도비처럼 떠나는 해피엔딩이 있다. 하지만 사측과 분쟁이 생겨 회사를 떠나고도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는 경우가 있다. 거대한 회사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대부분 노동자가 먼저 지쳐서 사용자에게 굴복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퇴사하면서 겪은 억울한 사연이 있었지만 '내가 참아야지'하고 회사 정문을 나섰다. 반면 나와 다른 결정을 한 이가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싸움



프리랜서 가능성을 타진한 지 5개월, 운이 좋게 일감이 들어왔다. 2주 동안 관련 작업을 해주던 와중에 예전 글에 나온 전 직장 동기 A에게 연락이 왔다.


"형 노동부에서 전화가 올 건데 얘기 좀 잘해주세요"


'알았다'라고 답하고 나니 노동부에서 연락이 왔다. 담당관이 묻는 질문에 내가 겪은 그대로 답했다. 전 회사에 대한 비리와 열악한 노동조건, 비위에 대해 물었다. 답변이 끝나고 일주일 뒤 그 친구는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렸다. 날짜가 좀 지나서 정확한 워딩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대략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법률 관련된 문서가 어려울 줄 알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변호사, 검사들이 보는 자료가 많아서 그렇지 조금만 공부하고 보면 할만하다. 노동부에 진정을 낸 후 회사에서 처음으로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엔 안 그러더니... 이제 신문고, 지자체 등 여러 곳에 민원을 넣어야겠다. 정신 차리게 해주고 싶다"


kt80ir71617nr1e4f0jq.jpg 해리 포터의 도비는 자유가 됐지만 퇴사자는 가끔 전 직장에 얽매이기도 한다 /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퇴사하고 6개월 넘게 고용노동부를 들락날락했던 A는 회사의 협박도 받았다. 회사의 부정한 사항을 있는 그대로 노동부에 말한 것뿐인데 전 직장에서는 '제정신이냐'며 A를 위협했다. 나 같았으면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고 말하며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다. 똥을 치우기로 마음먹었다. 6개월 전에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몇 년간 일해서 정도 많이 쌓인 곳인데 너무 정 떨어지게 하네요. 다음 사람을 위해서라도 하는 데까지 해보려고요. 끝장 봐야죠"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의 말에서 다음 사람을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A는 "그 정도로 남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녀석이 '내가 당했으니 다른 사람은 안 그래야지'라는 생각으로 민원을 넣은 걸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정신을 차리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어리둥절하고 내 앞에 놓인 상황을 파악하는데 시간을 허비한다.


images (1).jpg 이미 어긋나 버린 노사관계는 위태로운 줄 같다 / 이하 구글 이미지 검색


퇴사를 할 때도 비슷하다. 나도 회사에 대한 개선 사항을 건의하면서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자세한 내용은 이 글로). 상사는 논리로 나를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하자 집요하게 '퇴사'라는 단어를 끄집어 내려했다. 자진퇴사를 유도해 회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겠다는 얄팍한 수였다. 일이 꼬였고 전 직장을 떠나게 됐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회사를 떠나면서 분란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내가 다시 기자일 하나 봐라'라고 다짐하며 짐을 정리했지만 앞일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없는 얘기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거기에 굴복하고 짐을 쌌다. 남아있는 후배들을 위해 월말까지 일하면서 인수인계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퇴사 의사를 밝힌 다음 날 회사는 내 책상을 뺐다.


10-Signs-You-Are-Burning-Out-And-How-To-Stop-It.jpg 거대한 회사와 싸운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내 선에서 끝내고 싶었다



그는 나보다 한 달 정도 먼저 회사를 떠났다. A도 퇴사하면서 회사에서 임금을 비롯해 입사 당시 약속했던 재택근무 등의 요건을 지키지 않았다고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냈다. 이뿐만 아니라 실제 직원들이 매일 30분씩 더 일하지만 임금에 포함되지 않는 것 등 회사의 비위는 꽤 많았다. 회사에 진정이 들어갔다는 소식이 도착하자 그 친구는 협박 전화를 받았다. "네가 뭔데 없는 말을 만들어내냐"라는 당황스러운 반응과 함께.


A는 당황했다. 퇴사할 때는 갖은 말로 위로하는 척했기에 역풍을 심하게 맞은 셈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자기 선에서 끝내고 싶다'라고 하면서 서류를 하나씩 준비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회사에 타격을 주고 싶은 마음과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고 한다.


다행히 고용노동부에서는 여러 취업사이트의 후기와 실제 근무한 퇴사자들의 증언, 단기간에 많은 직원이 나간 정황 등 다각도로 상황을 분석했고 A의 손을 들어줬다. A는 이제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반면 전 직장은 10년 넘게 회사를 운영하면서 수백 명의 퇴사자가 나갔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사람을 뽑아 쓰고 버리기를 반복했고 불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내보냈다.


이 글을 쓰면서 부끄러움과 안도감이 같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짐을 떠안긴 거 같은 죄책감과 회사가 합당한 처분을 받는다는 마음 말이다.




"매번 이런 일로 전화드려서 죄송해요"라는 그의 말에"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이거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짧은 말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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