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었을까?

퇴사자 생활 지침서

by 변준수

시간이 금세 지나가는듯하다. 회사를 나오고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6개월이나 지났다. 평소 서울 도심을 자주 걸어 다녔는데 요새는 시간이 없어 집 근처에서 작업하기 바빴다. 달력을 보니 8월 한 달도 다 가고 9월이 오고 있었다. 8월의 마지막 날, 오랜만에 서울 도심으로 향했다. 광화문, 시청, 종로는 평소 자주 가던 곳이고 좋아하는 장소이지만 한동안 안 가다 보니 뭔가 '금단의 장소'처럼 돼버렸다.


예전부터 정동길과 시청역, 덕수궁을 참 좋아했다. 정동길은 조용하면서 밝은 느낌이 살아있는 거리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조금 어색하고 짜증 섞인 장소가 되어 갔다. 퇴근하면 근처도 가기 싫은 곳이 회사다. 나도 비슷했다. 퇴사하고도 쓸데없는 고민들이 정동길로 향하는 발길을 붙잡았다. '일이 좀 풀리고 나면 가야지', '괜히 전 직장 사람 만나면 짜증 날 거 같아' 등등. 내가 가고 싶으니 가면 그만이었지만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동극장에서 바라본 정동 제일교회 예배당 / 이하 촬영 포카텔로


그러다 전 직장 동료들과 연락이 닿았다. '시간 되면 한번 오라'는 상투적인 말과 함께.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통화도 잊은 채 살다가 우연히 TV를 봤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익숙한 동네가 나왔고 발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봤다. TV를 보며 갈까 말까 생각하던 중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께서는 한 마디를 던졌다.


"내가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으면 그 회사를 떠난 뒤에 가보면 알 수 있어. 너 가졌을 때 만삭으로 아빠 전 직장에 간 적이 있는데 어찌나 환대를 받았던지. 일도 잘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면 환대할 거고 그렇지 않다면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날 어떻게 생각할까



6개월 만에 갔지만 길은 그대로였다. 사실 항상 변치 않는 그 모습이 좋았다. 매일 출근하던 시절에 보이지 않던 풍경도 오랜만에 보니 한눈에 들어왔다. 미술관, 교회당, 학교, 회사 건물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시립미술관에 가서 전시회를 봤다. 시립미술관의 상징인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둘러보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미술관에 나오니 정동 제일교회와 정동극장이 보였다. 백여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든 건물 너머로 퇴사한 회사 건물이 보였다.


회사 건물에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코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굳이 불편한 사람과 마주칠 필요는 없지'하고 마음먹고 평소 휴식을 취하던 정동극장 카페로 갔다.


쉬는 시간에 가끔 들렀던 정동극장


나는 환영받는 사람일까?



약속을 잡은 사람은 직장동료이자 후배였던 친구다. 내가 퇴사한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동료라서 더 반가웠다. 그 친구와 동기였던 후배도 자리에 함께 했다.


회사를 떠난 이후 전 직장의 상황, 업무 변화, 그동안 회사를 떠난 사람들... 오랜만에 그 회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해했다. '운이 좋게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책 작업이 끝나간다', '회사에서 아프던 허리가 결국 사달이 났다'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모처럼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전 직장에 꼭 갈 필요는 없다. 다만 원수처럼 떠나지 않았다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포카 : "J 씨. 난 직장동료, 선배로서 어땠어요?"

J : "전 좋은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안 좋았으면 제가 안 나왔겠죠?"

포카 : "S 씨는 어때요?"

S : "욕해도 되죠?ㅋㅋㅋ 농담이에요. 일할 때 좀 예민하시긴 했지만 그만큼 꼼꼼했죠. 후배들과 티타임도 많이 갖고 잘해주셨어요. 그만큼 선배 이야기도 많이 들어야 했죠"


두 사람은 나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던 이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냉정한 분석을 해줬다. 나에 대한 평가를 더 듣다 보니 두 가지 정도 중요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장점이라고 생각했던걸 누군가는 단점으로,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경쟁력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성격이 세심한 편인데 좋게 말하면 꼼꼼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예민한 스타일이다. 보기에 따라 한 끗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달리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어디에서 머물든 내가 떠난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평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 모든 것을 다 생각하면 머리가 터져버리고 말 거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객관적인, 악의가 없는 평가를 듣는다면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매거진에 글을 채울 욕심으로 시청으로 향했지만 기대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회사 생활을 개판으로 하진 않았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고 '어딜 가든 항상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만나 나에 대해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흔적을 남긴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라는 말처럼 내 발자취가 항상 아름답진 않겠지만 내가 머문 자리를 한 번쯤 다시 가서 둘러보길 바란다. 혹시 내가 빠트렸던 뭔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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