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 생활 지침서
9월이 밝았다. 학생들에겐 새 학기가, 농부에게는 추수철이, 취준생에게는 하반기 공채시즌이 돌아왔다. '이번 하반기에는 쉬어야지'하면서 남일처럼 생각했지만 공채시즌이 다가오자마자 몸이 반응했다. 뭐든지 해야만 할 거 같은 분위기가 들었고 오랜만에 이력서를 점검했다.
이력서에 붙은 앳된 얼굴을 보니 새삼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포토샵을 하지 않아도 탱글탱글했었는데 이제는 그때 같진 않다. 이력서에서 추가할 부분은 많이 없었다. 전 직장에서 일한 경력과 그동안 했던 프로젝트들, 책, 기명기사 스크랩한 내용을 첨부했다. 이 이력서를 조만간 쓰게 될지 아니면 묵혀둘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갈림길과 가능성
갈림길이라고 썼지만 내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회사를 나와서 프리랜서로 가능성을 열기 위해 수개월간 미친 듯이 일했지만 돌아온 건 악화된 건강뿐이었다. 역시 무한경쟁사회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는 건 어려웠다. 더군다나 글 쓰는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고 모든 걸 포기한 채 '다시 입사해야겠다'라고 생각할 무렵 일감이 들어왔다. 얼마 전부터 크리에이터들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관련 내용을 조사, 글을 작성하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라디오 작가 같다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거 같다. 초반 보수는 많지 않지만 내 가능성을 믿고 맡겨줬으니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하기에 따라 보수는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계획 없이 회사에서 나오진 않았다. 원고를 쓸 생각이었고 웹진에서 그간 하지 못했던 취재도 많이 했다. 글도 쓰고 싶은 만큼 썼고 공저이긴 하지만 조만간 책도 나온다. 아쉽게도 이 모든 게 돈과 직접적으로 연관된진 않았다. 돈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다.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판단의 척도로 돈만큼 정확한 게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의 가치
'나는 가치가 없는 걸까'
'내 글은 쓰레기인가'
'계획 세우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다 부질없었나'
일이 풀리지 않자 온갖 잡다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다는 마음만 품고 나왔다는 후회도 들었다. 회사 바깥은 예상보다 팍팍하고 경쟁이 치열했다. 회사의 가치와 이름값에 기대 기사를 쓰고 글을 편집할 때는 '내가 잘해서 사람들이 많이 보나보다'라고 치기 어린 망상을 하기도 했다. 울타리를 벗어나고 거품이 빠지고 나서야 내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평가하는 가치는 자신이 아는 것보다 낮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하는 일에 따라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회사를 다닐 때 기사를 작성하고 글을 편집하면서 콘텐츠에 대해서 항상 생각했다. '어떤 콘텐츠가 재밌을까', '어떤 게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콘텐츠를 잘 풀어낼 수 있을까' 등등.
콘텐츠에 대한 고민은 아이디어로 승화됐고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회사에서 트렌드를 분석하는 법이나 상업성에 관한 감각도 함께 익혔다. 예상보다 많은 부분이 내 안에서 융화되고 있었다.
함께 일해보자고 제의한 크리에이터는 내게 "저는 저와 함께 일할 멀티플레이어가 필요합니다. 포커텔로님은 아이디어도 좋고 글도 많이 다뤄보셨어요. 편집, 상업적 감각도 있으시니 함께 일하면 좋을 거 같아요"라고 했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싶었다. 좋은 기회였지만 내가 성장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 프리랜서는 프로의 세계니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일을 하기로 했다. 한 달째 일을 하고 있다. '실수하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빨리 적응하고 있다. 크리에이터의 Needs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글을 쓰고 있다. 영상과 글을 분석하다 보니 내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글을 쓰는데도 유용한 자료가 쌓여 기분이 좋다. 내 경우는 운이 좀 따랐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갑자기 오진 않을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 온 기회를 잘 분석해 놓치지 않길 바란다. 프리랜 서건 회사원이건 우리 모두 일하는 건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