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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Sep 23. 2021

종치는 여자

"네가 뭘 먹는지 쓰라고! 한의사 선생님이 써오라잖아. 왜 안 쓰는데??? 한 달에 한약값이 70이 넘거든! 내가 돈 많아서 데리고 다니는지 아니? 왜 안 쓰는데???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도 딸은 3달의 시간 동안 고작 2틀 동안의 식이 일지를 쓴게 다였다.

친 나는 그러던가 말던가 한의원에 내놓은 돈만큼만 먹으라는 마음으로 내려놓았다. 숱한 싸움을 해도 말을 안 들어 처먹으니 어쩌란 말인가!


갑자기 생긴 아토피로 양약부터 시작해 이것저것 해보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의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고 있다. 그리고 치료 과정에 작성해야 하는 식이 일지는 포기하는 것으로 했다.


그런데... 아이가 식이 일지를 쓰고 있다. 엄마 마음을 언제 쑥대밭으로 만들었냐는 듯 너무 열심히 하나하나 자세히 쓰고 있다.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 걸~)

"왜 이래? 이제 막 포기했는데, 왜 열심히 쓰는데?"

궁금했던 나는 아이에게 질문했는데... 그냥 하지 말걸 그랬다.


"나 초콜릿 엄청 먹고 싶거든, 그래서 한의사 선생님한테 대체 언제 초콜릿 먹을 수 있냐고 물어봤어. 근데 식이 일지를 안 써서 내가 어떤 음식에 반응하는지 모르겠대. 먹고 싶으면 식이 일지를 써와야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쓰는 건데? 왜?"


아... 엄마 아빠의 피 같은 돈, 써보지도 못하는 돈은 아랑곳하지 않고... 초콜릿을 먹기 위해 쓴다는 아이의 말에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나쁜 X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잔소리가 개뿔 소용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한다.

본인의 의지가 없는 한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나는 매일 아이의 뼈와 살이 되는 귀중한 말들을 허공에 날려댄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절대 입 밖으로 잔소리를 내지 않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고3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알아서 잘하나 보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진 않다. 그럼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포기했나?' 보다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런 그녀의 '내려놓음', '도가 트임'에 광분하며 비법을 전수받고자 했던 나는 귀를 쫑긋 세운채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야!! 도가 트긴 무슨 도가 터!!!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 미쳐버릴 거 같아. 너 우리 집 식탁에 종이 왜 있는지 아냐? 밥 먹으라고 말하러 가기도 싫다. 문 열고 보면 복장 터지니까 그냥 종 치는 거야. 나와서 밥 먹으라고!!"

정말 그녀의 식탁에는 종이 놓여 있었다. 엄청난 비법은 나오지 않았고, 그녀의 깊은 속마음만 흘러나왔다.

"쟤는 진짜 한량이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다...  그렇다고 내가 이래라저래라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본인 인생이고, 본인이 한 선택에 직접 책임져야지. 내가 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책임지는 걸 배워가는 과정이라 생각해.  내가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 같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오랫동안 잘 가르쳤으니 이제 큰 울타리 안에서 본인이 해나가야지. 그냥 멀리서 지켜보는 거야. 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때 손 내밀어줘야지."


머리로는 알 수 있는 말들 그러나 현실에선 이뤄지기 힘든 말들.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입을 닫을 수 있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아이 인생의 주인공이 마치 엄마인 것 마냥 불안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으로 아이의 삶을 핸들링하려는 나를 바라본다. 매일 밤 '그러지 말아야지'라며 마음을 가다듬는 엄마 마음을 아는 건지 아이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난 포기했어. 완전히 포기했어."

대체 뭘 포기했단 말인가?!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뭘 포기했는지 물었다.

"엄마가 나 내려놓고, 관심 끄겠다는 말... 그런 거 다 포기했어. 또 내일이면 기운 차리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할 거잖아. 나 포기했으니까 그냥 엄마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


하... 결국 딸아이가 포기해버렸다.

그래! 나는 드라마에 나올법한 '기다리는 엄마, 바라봐 주는 엄마' 캐릭터는 아닌가 보다.

이제 딸이 포기했다고 하니 나는 편하게  매일매일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을 할 것이다.

딸아이의 귓등도 스치지 않을 말들을 말이다.  


그래도 엄마인 나는 믿는다.

초콜릿 하나를 먹겠다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딸아이의 의지를.

그리고 그 의지가 다른 곳에서도 발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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