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한나 Mar 15. 2020

비련의 여주인공, 행복을 맛보다.

퇴근 후 유난히 꼬질꼬질해 보이는 남편에게 "오빠 왜 이렇게 지저분해 보이냐?"라고 물으니

남편은 말했다. "새벽부터 진짜 땀 뻘뻘 흘렸다."

"왜?"라고 묻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입은 자동으로 되물었다.

그때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네가 브런치에 내 방귀 이야기 쓰고, 내 사진 올렸잖아.
그래도 모자이크는 했더라?
나 새벽에 나가기 전에 양치하면서 내 방귀 글 보는데...
진짜 쪽팔려서 겨드랑이에서 땀 쭉나더라..  
털들이 젖어서 홍해가 갈라지듯이 반은 가슴으로, 반은 팔뚝으로 붙어버렸어.


"아 진짜 더러워! 근데 오빠~표현력 오진다!!!"


남편은 팔을 높이 들고

이리 와서 냄새 한 번 맡아봐. 빨리!!!~ 이거 네가 이렇게 만든 거니까 너도 느껴봐!


나는 "싫어!!!!"라고 소리쳤지만, 남편은 두 팔을 벌려 나를 꼭 껴안았고 내가 숨 참는 것을 포기하고 살짝 들이마시는 순간에 나를 놓아주었다. 아주 짧은 들숨이었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냄새라는 것은 확실했다.

 

남편이 놓아주자마자 나는 큰소리로 "아직 봄인데 겨터파크 개장하면 어떡해??"라고 물으니 남편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 사진 모자이크 하지 마! 그냥 시원하게 공개해!
모자이크 하면 다음(Daum) 메인에  안 뜬단 말이야.
나 정말 부끄럽지만, 그냥 올려! 어차피 내 이미지 쓰레기 돼버렸어.
마누라 글이 다음(Daum) 메인에 걸릴 수 있다면, 오빠가 뭔 짓을 못하겠냐?!
그냥 공개해!


뭔 소리냐 대체...

허구한 날 아내가 대작가가 된다면 바지라도 벗고 돌아다닌다는 남편은 참 나를 웃게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말 대잔치'이지만 요즘엔 이런 말들이 힘이 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남자는 24살, 대학교 3학년 때 나에게 장가를 왔다.

돈을 아껴보고자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남편은 4학년이 돼서는 취업준비로 마음고생이 많았다. 감사하게도 수십 개의 지원서를 쓴 회사 중 한 곳에  합격하여 딸아이 돌잔치할 무렵에는 직장인이 되어있었다.

남편은 입사하고, 딸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나에게 말했다.

"한나야, 너도 졸업해야지. 마지막 한 학기 남았는데 다민이 어린이집 보내면서 졸업하자!"

시어머니는 집에서 애 키울 거면서 무슨 졸업장이 필요하냐고 되물었지만, 남편은 학비를 대주며 졸업을 독려하였다. 그렇게 나는 27살의 나이로 대학을 졸업했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졸업이라도 하자며 갔던 학교였는데, 그만 대학원 진학을 꿈꿔 버렸다.


사실... 그 당시 저렴한 투룸 전셋집에서 아이와 함께 살며 공부를 더하겠다는 생각은 참 이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자금 대출이라는 제도를 믿고 쉽게 결정해버렸다.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실험실에서 상주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커피 한 잔 사들고 동기들과 캠퍼스를 누리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 되곤 했다.

심지어 파릇파릇 젊은 친구들이 즐기는 대학 축제 노래대회에 28살 아줌마가 나가서 막춤을 추고 아웃백 외식상품권을 받기도 했으니... 나는 참으로 유쾌한 시간을 보낸 것이 확실하다.(그때 처음으로 우리 가족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란 곳을 갔고, 아이는 큰소리로 "된장국 주세요"라고 주문을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이토록 예쁘고, 좋았던 기억은 글을 쓰고자 생각을 깊이, 골똘하게 할 때만 떠오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힘들게 살아온 일들'만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시집가서 학교도 빨리 졸업 못하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예쁜 옷도 못 입고, 돈에 쪼달리고, 화려하게 살아보지 못한 내가 너무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가장 내 자신이 싫었던 순간은 추운 겨울에 출산하고, 입을 옷이 없어 임부복을 다시 꺼내 입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제길....

여자들이 하나씩은 있다는 명품가방은 가져본 적도 없다.

20대 때 나의 소원은 옷을 살 때 한 번만이라도 가격을 보지 않고, 내 맘에 드는 것을 사는 것이었다.

'30대가 되면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30대에도 가능하지 않았고, 아마도 40대에도 불가능할 거 같다.


이러한 아쉬움은 나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모유가 나오지 않아 배가 고파 우는 아이에게 다 떨어진 분유를 긁어모으다 결국 포기하고 슈퍼로 달려가 우유 중에서도 가장 저렴했던 890원짜리를 아이 젖병에 넣어주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기만 하다.(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지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런 나는 아직도 아기용품을 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아가들의 예쁜 신발만 봐도 한참을 쳐다보다 이제는 신겨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갈길을 간다. 그토록 예쁜 구두와 옷에 눈을 떼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 공주 옷을 사달라고 한 아이에게 나는 '비싸다'는 이유로 사주지 않았고, 한 겨울에 벼룩시장에서 2000원짜리 여름용 공주 옷을 사주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는 표정으로 겨울 내복 위에 공주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가득하다.


이렇게 우울하게 글을 썼지만, 내가 지금 이 순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나는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행복했다. 달달한 분유에 길들여진 아이가 맹맛의 우유도 잘 먹는다며 남편과 즐거워했고, 쪽쪽 젖병을 빨아대며 먹는 아이가 예쁘고 감사했다. 그 후에 엄마에게 돈을 빌려 아이의 분유를 사서 다시 먹이기까지 탈나지 않은 아이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사실 핑크 드레스를 살 때도, 다른 아줌마가 양보를 해서 살 수 있었다며 집에 와서 얼마나 남편에게 자랑했는지 모른다. 2000원의 득템을 자축했었다.

그때뿐인가? 임부복을 다시 꺼내 입을 때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애 낳으면 배 쏙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 옷은 살 빼고 살 거야."라며 추운 겨울을 나고자 따뜻한 임부복을 내가 꺼내입었다. 그리고 명품가방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내 스스로 명품이라고 인정하는 가방을 두 개는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는데 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련하고 가슴 아픈 일들로 남아버렸을까?
나는 지금도 하루하루 감사하며, 큰소리로 깔깔 웃어대는 유쾌한 아줌마가 분명한데... 왜 어느 순간에는 가련한 여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행복지수 가득한 아줌마와 비련의 여주인공 사이를 오가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했다.

 


내가 비련의 아줌마를 선택하는 순간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1. 나는 백화점 매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들고 가는 다른 아줌마를 볼 때

2. 친구가 결혼하자마자 큰 아파트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시작하는 것을 볼 때

3. 매년 해외여행 가는 친구 볼 때

4. 증여세 걱정하는 사람 볼 때

5. 노후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되는 사람을 볼 때


말 그대로 내가 누군가의 삶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순간, 행복한 아줌마에서 비련의 아줌마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교하다 보니 내 가방이 명품이 아닌 것을 깨달았고,

비교하다 보니 내가 먹인 분유가 가장 저렴한 것임을 알았고,

비교하다 보니 내가 입은 임부복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비교하지 말아야겠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

 눈이 달린 이상, 귀가 달린 이상... 나는 때때로 비련의 아줌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다시 내 옆을 보겠노라 결심한다.

'엄마가 좋아'라며 아직도 안기는 16살의 사춘기 딸이 건강하게 내 곁에 있음을...

간식 소리에 나에게 쏜살 같이 달려오는 어여쁜 강아지 사랑이가 있음을...

겨드랑이에서 진땀을 흘리며 작가의 길을 응원하는 남편이 있음을...


그리고 때때로 비련의 아줌마가 되더라도, 같이 사는 다 큰 아줌마가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용돈도 후하게 주며 지금껏 살림하느라 고생하는 '비련의 아저씨'도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는 희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150만 원짜리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