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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Mar 12. 2022

스트레스를 먹고 사는 남자


"15년도 더 된 일이야.

빨래를 돌린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띠리리리리릭~" 다 됐다는 소리가 안 나는 거야.

세탁실로 들어갔지. 세탁기 뚜껑을 접어서 열어봤는데 세상에나 통돌이 안에 물이 꽉 찼는데도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 거야. 물의 적정 수위를 맞춰주는 센서가 고장 났다나 뭐라나..."


왜 세탁기 기억이 떠올라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는지 모르겠다.

글도 써야겠고, 영상도 찍어야겠는데 머리통이 코드를 뽑아버린 전자제품처럼 먹통이 된 기분이었다.

"진짜 이상해. 예전에는 쓰고 싶은 게 많아서 메모를 할 정도였는데, 아무 생각도 없어. 정말이지 그냥 텅! 이런 느낌이라니까~"

옆에 있던 남편은 대꾸라도 해야겠다 싶었는지 한 마디 거든다.

"나도 회사생활 16년 만에 처음으로 특허 냈거든~~~ 사람 머리에서 생각이 뭐 콸콸콸콸 나오겠어??? 너무 집에만 있으려고 하지 말고~ 바깥 구경도 하고~ 재밌는 소설책도 읽고 그래 봐~!"


그래. 콸콸콸콸 나오면 세탁기처럼 고장 난 거겠지.

하지만 꼭지를 돌려서 물이 안 나오는 것도 고장은 고장인데...


남편은 회사 생활 16년 만에 머리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한 해를 보냈다.

입사 후 한 번도 내지 않았던 특허를 2개나 냈고, 미지의 세계라는 다른 나라의 언어 급수를 두 개나 취득했다.

'이 남자가 이런 인간이 아닌데... 뭐지...'

25년 동안 이 남자를 지켜본 나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고 3 때 열심히 안 함(아주 가끔 삘 받을 때만 열심히 함)

-대학가서도 열심히 안 함(도서관이라고 뻥치고 겜방에서 스타 크래프트만 열심히 함)

-제대 후에도 열심히 안 함(기계 만드는 동아리 활동만 열심히 함)


대학교 3학년, 24살의 복학생 신분으로 나와 결혼을 한 남자.

그는 곧 아이 아빠가 될 사람으로 한 시라도 빨리 취직을 하기 위해 1-2학년 때 망친 학점들을 보수하겠다며 늦은 밤까지 추운 방에서 공부할 때가 많았다.

적성도, 월급도, 지역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공채 공고만 보이면 밤을 새워서라도 이력서를 작성하던 그는 자기소개서마다 '딸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적었고, 다행히 가장 가고 싶어 했던 회사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도 참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은 '딸기 한 번 원 없이 먹고 싶었던 내 소원'을 가볍게 이뤄주었고, 현재는 냉동이 아닌 생 애플망고와 비싼 샤인 머스캣도 종종 사 먹을 수 있는 풍요로움을 알게 해 주었다.


나도, 그도 각자의 삶에 큰 욕심 없이 그저 딸 하나 뒷바라지하면서 노후를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이루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목표도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 어떤 것도 넘보지 않는 아니 넘볼 수 없던 우리는 '딸내미 대학 보내면 끝'이라는 마음으로 서로를 도닥이며 하루하루를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남편의 삶에 불안함이 엄습했다.

"딱히 승진에 대한 욕심은 없는데... 근데 아무것도 준비 안 하고 있으면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자꾸 면담할 때마다 '준비 잘하고 있냐'라고 묻기도 하고. 나만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거 같기도 하고. 뭐가 맞는 건진 모르겠어. 큰 욕심은 없는데 그냥 마음이 불안하고 또 불편해..."


편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

누군가는 이것을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스트레스는 남편의 삶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내야 한다는 의무감'

'무슨 자격시험이든 취득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

'입사 순간부터 15년 동안 떨어진 설계 시험을 올해 반드시 붙어야 한다는 압박감'

인생을 좀먹게 하고 망치게 한다는 '스트레스'가 동반된 1년의 시간 동안 남편은 직장 생활 중 가장 많은 성과를 만들어냈다.

"남편!!! 스트레스 좀 받고 살아야겠는데~~~!!"


올해 남편은 본의 아니게  자신과 함께 일하는 파트원들이 특허를 많이 내도록 독려하고, 특허를 취합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옆 파트가 특허 획득하는 모습을 보며 매일매일 압박을 받고 있는 이 남자.

"아이디어는 아니더라도 개발하다가 불편한 것들이라도 적어볼까요?"라며 팀원들에게 애걸복걸하던 남편은 무거운 의무감 속에서 벌써 한 달 동안 아이디어를 5개나 제출했다.


"스트레스... 요 녀석... 왠지 오묘해~~~"

실제로 '스트레스가 나쁘다'는 선입견을 깨는 연구가 이미 많이 세상에 알려져 있다.

연구 이야기에 앞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질문을 해보겠다.

***스트레스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나요?

1) 스트레스는 해로우므로 반드시 피하고 줄여야 한다.

2) 스트레스는 유용하므로 반드시 수용하고 활용해야 한다.

아마도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1)번을 택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반드시 막아야 할 적으로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적어보겠다.

1998년 미국에서는 성인 3만 명을 대상으로 '작년 한 해 동안 경험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는지',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롭다고 믿는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8년 뒤 연구자들은 3만 명의 참가자들 중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사람들이 사망 위험이 43%가 증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잠깐!!!!!!

무조건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사람들이 사망 위험이 높다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롭다고 '믿었던'사람들만 사망 위험이 증가했다는 것!!!

비록 높은 스트레스 수치를 가졌더라도 '스트레스가 해롭지 않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사망 확률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는다'라고 기록된 사람들보다 사망률이 낮았다.(옛 어른들이 '사람은 모름지기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의 과학적 근거가 될 수 있겠다.)

게다가 최근 과학 연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영리해지고 강인해지며 더 큰 성공을 거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스트레스... 나쁜 녀석이 아니었어!!!'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의 삶은 '역경',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 순탄하게만 살아갈 수가 없다.

누구나 다 겪게 되는 힘든 순간들 속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만 바꾸면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는 것을 보니 한 번쯤 우리의 사고방식을 전환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나는 오늘 이 글을 남편에게 바친다.

"여보 스트레스는 나쁜 게 아니야~~ 여보에게 영리함을 더해줘서 특허 아이디어도 주잖아~~ 특허 많이 써서 나도 용돈 좀 팍팍 줘~~~ 스트레스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독인 거래~~ 알겠지??"

생각해보니... 나에게 아이디어가 안 나오는 이유도 스트레스가 없어서인가보다.

너무 느슨한 삶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나에게 어떤 스트레스를 줘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참고도서: 스트레스의 힘, 켈리 맥고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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