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앞으로 뭐 할 건데?"
8년을 다닌 회사에 사표를 내던진 아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첫마디였다.
아버지의 질문에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하려고요"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아버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당분간 얼마나?"라며 되묻는다.
아들의 눈시울은 붉어졌고, 이내 마음에 담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구 씨한테 하던 거 반에 반만 저한테 하시면 안 돼요? 구 씨 안 보이면 어디 아픈가? 밥은 먹었나? 그렇게 애지중지 마음 쓰면서 어떻게 저한테는... 제가 뭐 그렇게 썩 잘나진 않았지만 밖에서 욕먹고 다니지는 않아요. 일하다 보면 인간 아니다 싶은 애들 많은데, 저 밖에 나가서 아버지 누구냐 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중략) 저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얼굴 붉히지 않고 험한 꼴 안 보고 선물 받고 나왔잖아요. 그럼 된 거잖아요. 제가 뭐 영원히 논다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그동안 수고했다 좀 쉬어라 그렇게 해주시면 안 돼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중 '염창희'의 대사)
이미지 출처: 네이버 TV '나의 해방일지' 13화최근 본방사수하고 있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한 장면이었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위로를 갈구하는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과거에 딸아이가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고... 가슴이 한 켠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사랑이는 좋겠다. 오줌 싸도 칭찬받고, 밥 먹어도 칭찬받고... 나도 개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그럼 우리 엄마가 칭찬 많이 해줬을 텐데..."
"엄마! 엄마 보기엔 부족하고 열심히 안 하는 거 같지만... 나도 정말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
"성적이 안 올라서 시험을 다시 봐야 되지만... 그래도 많이 떨어졌을 때 보단 오른 거잖아. 그래도 잘했다고 해주면 안 돼?"
아이의 말에 "그랬니? 네가 서운했구나... 너의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해"라는 아름다운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도 드라마에 나온 아버지처럼 눈만 크게 뜨고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말문이 막힌 것이 아니었다.
그저 참은 것이었다.
'야... 너는 그런 말이 나오니? 네가 한 행동들을 생각해봐라. 엄마도 있는 힘을 다해 참고 있다...'
-왜일까? 나는 왜 그럴까?
-나는 왜 내 아이가 늘 부족하게만 여겨지는 것일까?
-아이가 무슨 말을 해도 아이의 힘듦은 왜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저런 나약함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답답하기만 한 마음은 대체 왜 그런 것일까?
-기대를 많이 해서일까?
-계속되는 실망으로 지친 것일까?
-왜일까? 나는 왜 그랬을까?
이런 고민에 빠진 것을 아는지 아이는 어젯밤 "엄마... 날 너무 부족하게만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하며 미소를 지은채 본인의 방으로 걸어갔다.
'왜 나는 너를 믿지 못할까...'
그렇게 내 마음에 돋보기를 들이밀며 천천히 나를 돌아보던 중에 남편의 추천으로 설치한 '세바시' 어플에서 추천 영상 알람이 떴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영상을 재생하게 되는데...
작년 20대 청년 사망자 2700명.
생물학적으로 죽을 이유가 다른 세대보다 크지 않는 20대가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중 절반이 넘게 즉, 두 명 중 하나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 그들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언론에서는 정신건강, 우울증, 미래 불안, 취업 등의 이유로 청년들이 목숨을 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여러 자료와 상황을 통해 살펴본 정신건강 전문의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가족들과의 대화가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해봤자 소용없는 대화'
'힘들면 인정해주지 않는 경험의 반복'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가슴이 타들어가는 답답함, 못났다는 기분'
이해와 인정의 부재가 사람을 정말 죽음까지 몰고 갈 수 있을까?
정신의학에서는 이렇게 누군가의 대화 그리고 만남 속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소통되지 않아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오래전부터 '스몰 트라우마'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트라우마 중에서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쟁, 재난 등과 같은 빅 트라우마가 소나기처럼 옷을 한 번에 적실 수 있는 것이라며, 스몰 트라우마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아침, 점심, 저녁으로 듣는 비난과 부정의 목소리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서서히 무너져가며 옷이 젖어가는 것이다. 결국 스몰 트라우마라는 작은 결과들이 쌓이고 쌓여 죽음도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빅 트라우마가 되는 것이다.
(참고 및 인용: 세바시/2030의 삶을 무너뜨리는 '스몰 트라우마', 김현수 정신과 전문의)
영상을 보는데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야지!', '아이의 마음에 집중해야지!', '아이를 이해해야지!'라는 다짐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나는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아이의 목을 매일매일 조금씩 조르고 있는 엄마였던 것이다.
그래도 착한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인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네가 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네가 엄마한테 보여줬던 모습들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야..."라는 말을 아주 낮은 목소리로 전하며 아이가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를 알려주곤 했다.
아이는 이런 나의 말에 "미안해... 내가 엄마를 많이 실망시켜서 그런 거 같아... 엄마도 그럴 수 있어..."라는 말로 나의 악행에 합리화를 해주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난다.
'실패하고, 또 실패해도... 속도 또 속아도... 그 아이를 믿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엄마가 너를 안 믿어주면 너는 어디에 기대니?'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가슴에 너를 꼭 안고 '안전해...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지치고, 힘들 때... 상황을 묻기보다 너의 힘든 마음을 안아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실패한 기억들은 다 내려놓고, 새로운 선택 앞에서 웃으며 응원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나는 정말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손을 간절히 모으고, 내가 믿는 신께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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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들을게. 내 생각과 판단으로 너의 이야기를 제한하지 않을게...
너의 마음을 물어봐주는 엄마가 되어볼게.
나... 정말.... 너에게 스몰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부족하지만 노력해볼게. 고맙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