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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Jun 07. 2022

날씨 좋은 공휴일은 무서워!

"나 힘들어. 나 진짜 날씨 좋은 휴일이 무서워 질라고 그래... 다리가 후들거린다니까..."

하늘이 맑고 쾌청한 공휴일, 온도도 높지 않고 그늘에선 선선하기까지 했던 6월 6일이었다.

몇 킬로를 걸었나 궁금해 핸드폰 어플을 켜보니 1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이 남자를 따라다니면 침대에 눕자마자 레드썬을 맛보게 된다.

걸음 수를 채워 회사에 봉사활동을 신청한 이 남자는 하루 만 보는 기본이요, 주변 지인보다 걸음 수가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주말에 산 타는 애가 있어서~ 걔 이기려면 더 걸어야 해!!"라는 말을 하며 어떻게든 밖으로 나간다. 오늘은 2만 보를 채우겠다며 실시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괜한 일에  핏대 세우는 승부욕 + 30분 단위로 시간을 계획하는 치밀함 = 남편이었다.

나와는 한 군데도 비슷한 구석이 없는 이 남자와 여행이라도 떠나면 정말 목 깊은 곳에서부터 혓바닥이 줄줄 흘러나온다. 오래전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아침 7~8시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남편이 사전에 준비한 촘촘한 계획대로 움직이다 9-10시가 되서야 호텔에 돌아왔다. 국내든 해외든 떠났다 하면 반드시 가야 할 명소부터 꼭 먹어야 할 음식까지 미션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계획표에 도장을 꾹꾹 찍어대는 여행이었다.

몸이 힘들어지고, 당도 떨어질 때면...  남편이 미워지고 깊은 곳에서부터 서러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여보... 난 진짜 다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어... 여러 도시를 다 돌지 않아도 괜찮아. 갔을 때 너무 좋았던 곳 다음 날 또 가는 것도 좋고... 난 편하게 여행하고 싶어. 이 도시가 예쁘면 그냥 하룻밤 더 자는 거야. 극기훈련 말고 여행을 다니자..."


고맙게도 나의 말이 남편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스페인 여행을 할 때는 딸아이가 골목에서 만난 친구들과 내일도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는 말에 흔쾌히 호텔을 연장했으며, 다음 날 커피 한잔을 들고 벤치에 앉아 아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노을을 기다렸다


내 말을 기억해주는 것... 이제와 생각해보니 참 고마운 일이다.

그 마음이 고마워 나도 남편이 즐겨하는 활동에 동참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간다.

날씨가 좋은 날엔 아이스커피를 들고 같이 걸으려는 노력, 여행 계획에 지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후기를 읽고 숙박 및 맛집을 찾아보려는 노력...  


그 노력의 한 장면이 바로 어제도 존재했다.

'2만 보를 걷다니...'

매번 이렇게 날씨가 좋은 것도 아니고, 다행히 다음 날 아무런 일정이 없었기에 나는 남편의 걸음 수가 1등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2만 보가 넘도록 걸을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힘들면 바로 말해. 버스 타고 집에 가면 되니까."

"걸을 만 해?"

"힘들구나... 잠깐 쉬었다 걷자."

나를 헤아리려는 한 마디,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한 마디... 그 한마디가 고마워 힘이 들 때면 도넛을 입에 하나씩 넣어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상대의 말을 기억에 담아 둔 큰 마음이 오늘도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도 그가 자주 했던 말을 담아보려 한다.

"이렇게 감정 소모되는 상황 자체가 힘들어. 네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는 아는데... 어쨌든 나는 불편한 상황이 싫다고..."

필요할 정도로 정의감이 넘치는 나란 여자는 가끔 그 정의감이 활활 타오를 때가 있다. 결국 뜨거운 가슴은 입을 열게 만들고 마침내 나는 내 앞에 있는 이름 모를 사람을 향해 기어코 몇 마디를 하고 만다. 그리고는 이 상황에 멋쩍어하는 남편에게 말한다.

"누구든 해야 하는 말인 거잖아"

"내가 화를 낸 것도 아니고! 엄청 정중하게 이야기했잖아!"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이제 나도 약속할게.'

'좋아하는 것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힘들다는 것 마음에 꾹꾹 담아서 기억할 거야.'

'그리고 당신을 편안하게 해 줄 거야.'

'이제 입 꾹 다물고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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